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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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의료감정은 의료와 법의 경계에서 작동하는 절차이지만, 지금의 국내 의료감정 체계는 기관별·절차별 분절성과 감정 결과의 불일치가 겹치면서 신뢰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대한의학회 유성호 법제이사는 대한의학회 E-NEWSLETTER 기고를 통해 이러한 현실을 짚고, 의료감정 제도의 구조적 과제와 개선 방향을 제시했다.

의료감정은 의학적 사실과 전문적 지식을 근거로 해 법적 판단을 지원하는 공적 절차이다. 이 정의는 의료감정이 판결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자료임을 드러낸다. 환자 진료가 현재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면, 의료감정은 과거의 진료 행위를 재구성해 사회적 정의 구현에 기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의료감정은 사건의 과거를 재정리해 법적 판단에 필요한 사실관계를 세우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의료감정은 의학과 법이 만나는 교차점에 놓여 있으며, 그 공정성과 전문성은 곧바로 사회적 신뢰와 직결된다. 감정 과정이 흔들리면 사법 판단의 설득력도 함께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뢰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제도 운영과 감정인의 책임 있는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유 법제이사의 설명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감정은 법원의 감정·자문 제도,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K-MEDI)의 감정,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KMA-MAC)의 감정, 한국소비자원의 감정 등 여러 기관을 통해 이뤄진다.

법원의 감정·자문 제도는 의학적 판단이 필요한 사건에서 학식과 경험이 있는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하는 방식이다. 감정 의견은 판결의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지만, 법원은 그 의견에 구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판단한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은 분쟁을 신속히 해결하기 위해 감정위원회를 구성해 과실 여부와 인과관계를 심의한다. 소비자원 역시 의료감정을 수행하지만 절차는 비교적 간결해 접근성이 높다는 특징이 있다.

이 가운데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은 의료계 내부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은 공식 감정기관이다. 2016년 설립 이후 법원·검찰·경찰·보험회사 등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감정을 의뢰받아 왔으며, 표준화된 절차를 기반으로 감정 업무를 수행해 왔다.

의료감정원은 법적 판단에 필요한 의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기관으로서 객관성과 전문성을 원칙으로 한다. 감정 절차는 '의뢰–심의–배정–감정–검토–회신'의 순서로 구성되며, 각 단계는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안된 구조다.

먼저 의뢰기관에서 감정 신청이 접수되면 의료감정원 사무처가 이를 서면으로 받아 전자문서화해 내부 프로그램에 등재한다. 최근에는 온라인 접수 시스템이 도입돼 의뢰 절차가 한층 간소화됐다. 이후 감정심의위원회가 사건이 감정 대상에 적합한지 여부를 검토해 적합하지 않으면 사유를 명시해 통보한다.

적합하다고 판단된 사건은 관련 전문학회에 배정되며, 사건의 성격이나 복잡성에 따라 두 개 이상의 학회에 감정을 의뢰하기도 한다. 감정료가 산정되면 의뢰기관에 통보되고 납부가 확인된 후 감정이 시작된다.

배정된 학회는 자료를 검토해 감정서를 작성하며, 자료가 불충분할 경우 보정자료를 요청하거나 감정 의뢰를 반송할 수도 있다. 감정은 원칙적으로 3개월 이내에 완료되지만 지연되면 감정원이 해당 학회에 독촉을 실시한다. 이후 감정 결과가 회신되면 감정원 내부 심의위원회가 타당성과 형식을 검토해 최종 결재를 진행하고, 감정원 명의의 감정회신서가 의뢰기관으로 송부된다.

이와 같은 다단계 절차는 감정의 객관성과 일관성을 보장하는 장치이지만, 각 단계마다 행정적·전문적 검증이 반복되면서 절차적 부담이 커지는 문제도 드러난다.

유 법제이사는 의료감정이 과학적 근거와 합리적 추론에 기반해야 하며 그 과정이 투명하게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기관 간·전문가 간 감정 결과가 상이한 사례가 존재해 사회적 불신이 초래되고 있다. 특히 의료현장에서는 의료분쟁 재판에서 의료 측이 불합리한 결과를 받았다는 불신이 적지 않다. 일부 의료인들은 감정이 비전문가의 판단에 의해 왜곡되거나, 법원이 감정서를 형식적으로만 수용한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 법제이사는 "이러한 불신은 의료감정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요인이며, 의료인들이 제도에 협조하지 않게 만드는 장애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그는 감정 절차의 투명성을 높이고 감정인의 전문성 표준화를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의료감정원은 감정인 교육을 제도화해 감정서의 구성 방식, 표현, 법적 의미를 이해하도록 해야 하며, 감정인은 법적 사고와 증거 논리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 법제이사는 의료감정원이 '감정 결과의 환류 체계'를 마련해 법원 판결이 감정 의견과 어떻게 일치하거나 달랐는지 감정인에게 피드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 통해 감정인은 자신의 판단이 법적 판단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파악하고 감정 품질을 지속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유 법제이사는 "이러한 시스템은 의료인이 '감정이 재판에서 왜곡되지 않았다'라는 신뢰를 갖도록 하는 핵심 장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감정 관리 시스템의 통합 운영, 감정인의 법적 보호 강화, 인공지능(AI) 기반 감정 보조 도입 등도 객관성과 신뢰도를 높이는 수단으로 제시됐다.

현재 의료감정원은 감정인의 신원을 비공개로 유지해 감정부 명의로 감정서를 발행한다. 이는 감정인을 법적·심리적 압박으로부터 보호하고 독립적 판단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다. 반면 익명제는 책임성과 투명성 측면에서 한계를 지닌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유 법제이사는 감정인의 보호와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보호 실명제' 도입 가능성을 언급했다. 감정부 명의는 유지하되 필요 시 법원이나 수사기관에는 감정인의 신원을 비공개로 제출해 검증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결국 의료감정 제도 논의는 감정이 사법 판단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는지와 맞닿아 있다.

법원은 감정 의견을 중요한 판단 근거로 활용하지만 이에 구속되지는 않는다. 법원은 감정의 전문성·객관성·논리적 일관성을 검토해 동일 사건의 다른 감정서와 비교·대조하며 증거가치를 판단한다. 감정 전제 사실이 불명확하거나 근거가 모호하면 감정서의 증거력은 제한된다.

감정인 간 의견이 다를 경우 법원은 추가 감정을 명하거나 제3의 감정기관에 재감정을 의뢰할 수 있다. 감정인을 법정에 출석시켜 직접 설명을 듣고 논리적 설득력과 전문성을 평가하기도 한다. 다만 판결문에는 채택되지 않은 감정의 배제 사유가 명시돼야 하며, 이는 사법 판단의 정당성을 높이는 절차다.

유 법제이사는 "감정 간 불일치는 불신의 결과가 아니라 법원과 전문가가 각자의 영역에서 진실에 접근하려는 숙고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의료감정은 의료와 법, 과학과 정의가 만나는 접점이며, 의료감정원은 전문성과 사회적 책무성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며 "감정의 표준화·디지털화·감정인 보호 제도 강화·사법과의 협력 구조가 함께 발전할 때, 의료감정은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제도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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