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필수 의약품의 수급불안정이 장기화되며 환자 피해가 커지고 있지만, 정부와 국회가 내놓은 대책은 의료현장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거세다.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는 낮은 약가 정책과 공급 구조 실패는 외면한 채, 대체조제 간소화와 성분명 처방 의무화 입법을 추진해 환자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8일 성명서를 통해 "대체조제 간소화와 성분명 처방 의무화는 2000년 의약정 합의 정신을 훼손하는 만행"이라며 "법안이 강행된다면 의약분업은 폐돼야 마땅하다"고 밝혔다.
병의협은 필수의약품 수급불안정의 원인이 원료와 완제품 공급 부족, 품질 문제, 과다 수요, 낮은 약가, 정책 관리 부재 등 복합적 요인에 있다며 특히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지만, 유독 한국에서 반복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정부의 정책 실패와 저수가 구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병의협은 대체조제 간소화 추진이 현장에 미칠 위험을 경고했다. 현재 의료기관과 약국은 공급 불안 상황에서도 실시간 협의를 통해 환자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으며, 합법적인 대체조제도 원활히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제도가 바뀌면 약사와 의사 간 협의가 불필요해지고, 약사에서 심평원을 거쳐 다시 의사에게 전달되는 절차 지연으로 인해 환자가 변경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약을 복용하게 된다. 이 경우 약화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고, 의사 역시 인지가 늦어 적절한 대처가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의사 동의 없는 대체조제로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져 의료계와 약계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도 높다고 덧붙였다.
성분명 처방 의무화 법안에 대해서도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더불어민주당 장종태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수급불안정 의약품 지정 시 성분명 처방을 강제하고 위반 시 형사처벌을 규정하고 있는데, 병의협은 이를 "국제적으로 전례 없는 과잉 입법"이라며 "의사가 환자 치료를 위해 선의로 처방했는데 단순히 상품명 처방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형사처벌까지 내리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고 반박했다. 나아가 성분명 처방 강제는 의사가 어떤 제약사의 약품을 환자에게 투여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어 치료 책임 구조를 붕괴시킨다고 지적했다.
병의협은 또 현 상황을 타개하려면 가격·공급·책임 구조를 동시에 교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 신약 가격은 선진국 대비 64~66% 수준에 불과한 반면, 제네릭은 오리지널 대비 50% 수준으로 높다. 일부 제네릭은 오리지널과 동일하거나 더 비싼 경우도 있다.
병의협은 "식약처가 최저가 우선·단일 낙찰 구조를 고집하면서 특정 제약사 한 곳만 흔들려도 전국적인 품절 사태로 이어지고 있다. 무균주사제나 소아용 약제처럼 제조 유인이 낮은 품목은 저가 강제와 단일 계약 탓에 공급 중단 위험이 더욱 크다"며 "오리지널과 제네릭의 가격을 외국 수준으로 교정하고, 공급망을 다양화하며, 필수 의약품은 일정량을 비축하도록 제도화하는 동시에 생산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병의협은 이번 사안이 단순한 법안 문제가 아니라 2000년 의약정 합의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라고 진단했다. 대체조제 원칙은 당시 의약분업 과정에서 의료계·약계·정부가 합의해 마련한 사항으로, 이를 바꾸려면 반드시 재합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절차 없이 입법이 강행된다면 이는 곧 의약정 합의 파기로, 의약분업 제도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병의협은 "윤석열 정부의 무리한 의료정책 강행으로 이미 현장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며 "지금 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의료 정상화를 위한 근본적 해법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회는 즉시 대체조제 간소화법과 성분명 처방 의무화법을 폐기하고, 정부도 시행규칙 개정을 철회해야 한다"며 "만약 강행한다면 의약분업 폐지를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천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