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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여전히 늦은 진단과 제한된 치료 접근성, 미도입 신약의 공백 속에서 버티고 있다. 선진국이 국가 단위로 전문센터를 운영하며 고가 약제를 전액 보장하는 동안, 한국은 병원 자율에 맡긴 채 제도적 지원 없이 치료의 문턱만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구조적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대한폐고혈압학회가 움직였다. 내년 공개될 진료지침은 그 첫걸음이며, 학회는 전문센터 지정과 신약 도입을 통한 제도 개선을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진료지침, 폐고혈압 표준치료의 첫걸음
이는 표준화된 진료지침의 부재와 의료기관 간 편차에서 비롯된 결과다.
11일 대한폐고혈압학회 기자간담회에서 정욱진 회장은 "폐고혈압은 조기에 진단하고 전문적으로 치료하면 충분히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질환임에도, 인식 부족과 치료 접근성의 한계로 환자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학회는 내년 공식 발표를 목표로 폐동맥고혈압의 진단 기준, 단계별 치료 알고리즘, 생존율 통계, 신규 약제 현황을 모두 담은 통합 진료지침을 제정 중이다. 이는 환자 중심의 진료 표준을 확립하고, 기관별 편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다.
김경희 진료지침이사는 "현재 제정 중인 진료지침서는 국내 폐고혈압 진료의 표준화를 위한 시작"이라며 "조기 진단, 적기 치료, 생존율 향상을 목표로 학회와 정부, 의료계가 함께 새로운 진료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학회는 또한 현행 보험제도의 한계를 명확히 짚었다. 국내에서는 초기 단독요법만 허용되지만, 글로벌 가이드라인은 초치료 단계부터 병용요법을 권장한다. 결국 보험의 제약이 치료의 방향을 결정하고, 환자는 선택권을 잃는다.
정 회장은 "국민건강보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의 폐고혈압 5년 생존율은 71.8%였다. 과거 50%에도 못 미치던 시절보다 향상됐지만, 일본의 95% 수준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며 "이 격차는 단순히 약제 문제가 아니라 조기진단 체계, 전문센터 운영, 약제 접근성의 총합적 결과"라고 설명했다.
전문센터, 치료의 균질성과 접근성의 해법
반면 선진국은 폐고혈압 환자를 국가 단위로 관리하며, 진단·치료의 표준화와 고가 약제 접근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
영국은 극소수의 국가 지정 센터를 통해 환자 데이터를 중앙 집중 관리한다. 국가가 센터별 치료 성과를 평가하고, 고가 치료제는 전액 보장한다.
일본은 학회 주도의 인증 및 급여 연계형 제도를 운영하며, 전문센터 치료 시 난치병 보조 혜택이 부여된다. 캐나다 역시 지정 센터를 통해 고가 약제 접근권을 보장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관련 학회가 권고 기준을 제시하고 병원 자율에 맡기는 구조다.
이에 따라 의료기관 간 전문성 편차가 발생하고, 환자 데이터는 분절적으로 관리된다.
김대희 총무이사는 "낮은 국내 생존율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진단과 치료를 담당할 전문센터 제도화가 필수적"이라며 "학회 인증을 받은 전문센터가 진단과 치료의 표준화를 주도하고, 환자 등록·데이터 관리·전원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학회 주도의 전문센터 제도와 보험 급여를 연계하면 희귀질환 치료의 효율성과 접근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학회는 국가 차원의 환자등록체계(레지스트리) 구축을 병행해 치료 효과 분석과 정책 평가의 근거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신약 도입, 선진국 수준 치료의 전제조건
표준 치료제로 꼽히는 '에포프로스테놀'은 30년째 국내에 허가되지 않았다. OECD 38개국 중 에포프로스테놀이 허가되지 않은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이 약제는 전 세계적으로 폐고혈압 치료의 '골든 스탠다드'로 평가받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환자 손이 닿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이번 달 말 GSK '플로란' 도입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만약 도입이 무산될 경우, 학회는 얀센의 '벨레트리'를 대안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이밖에도 '타다라필', '흡입 프로프로스티닐' 역시 여전히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 회장은 "플로란이나 벨레트리 같은 에포프로스테놀 제제가 내년에는 꼭 국내에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이번 달 말에 GSK가 플로란 도입을 결정하지 않으면, 얀센의 벨레트리를 적극적으로 들여올 수 있도록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허가된 약제조차 급여 적용에서 배제되거나 일부 적응증만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다.
'소타터셉트'는 허가됐지만 급여가 적용되지 않고, '리오시구앗'은 폐동맥고혈압(PAH)에는 급여가 되지만 만성혈전색전증(CTEPH)에는 제외된다.
이처럼 불균형한 급여 체계가 치료의 연속성을 끊고 환자의 생존 기회를 제약하고 있다.
정 회장은 "약제 접근성이 개선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진료지침을 만들어도 환자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며 "정부가 의학적 필요성을 인정해 신약 도입과 급여를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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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으뜸 기자
acepark@medip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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