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대한민국 산부인과 분만 인프라는 고액 배상 판결의 급증과 잇따른 의료 소송 부담으로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 전문의들이 분만 현장을 떠나면서 필수의료 시설의 폐쇄가 가속화되고, 이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닌 현재의 공중 보건을 위협하는 국가적 비상사태로 번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건복지부가 산부인과·소아과를 대상으로 한 '의료배상보험 지원 계획'을 마련하고 예산을 확보한 것은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으로 평가된다. 특히 전문의 개인을 지원하는 방향을 중심에 둔 점은 취지에 부합하는 결정이라는 평가다.
그러나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계획안이 선한 의도를 담고 있음에도 현실과 동떨어진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어 이대로 추진할 경우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김재연 회장은 "대한민국 산부인과 분만 인프라는 현재 붕괴 직전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보건복지부가 의료배상보험 지원을 첫걸음으로 마련한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주요 설계 결함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정책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의사회가 꼽은 문제점은 ▲10억원을 초과하는 실제 배상 판결을 반영하지 못하는 불충분한 보장 한도 ▲'분만 실적' 중심의 협소한 지원 자격 ▲보험 설계 전문성이 부족한 기관에 위탁된 행정 구조 ▲졸속 추진이 우려되는 촉박한 일정이다.
실제 판례에 따르면 조기양막파열 관련 의료사고에서 13억 4천만원의 배상 판결이 내려지는 등 10억원을 훌쩍 넘는 사례가 빈번하다. 또한 지난 20년간 분만 가능 의료기관 5곳 중 4곳이 문을 닫았고, 산부인과 전공의 수료자 절반 이상이 분만을 포기한 현실은 고액 소송 리스크가 현장의 이탈을 가속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복지부 안은 '분만 실적이 있는 전문의'로 지원 대상을 제한했지만, 김 회장은 "이는 이미 분만을 포기한 57%의 전문의에게 복귀의 길을 원천 차단하는 조항"이라며 "분만 실적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산부인과 전문의를 지원 대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보험 설계를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위탁한 점에 대해서도 우려가 제기됐다. 김 회장은 "중재원의 기능은 분쟁 조정·통계 분석에 국한돼 있고, 보험 설계나 위험률 산정 경험이 전무하다"며 "의협 의료배상공제조합이나 전문 민간 보험사가 주도하고, 중재원은 사업 주관사가 아닌 데이터 제공과 자문에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권고했다.
추진 일정 역시 문제로 꼽혔다. 복지부는 9월 의견 수렴, 10월 사업 개시, 12월 계약 체결을 목표로 하지만, 김 회장은 "정밀한 보험 계리, 재보험 협상, 법률 검토, 현장 의견 수렴이 모두 필요한 사안에 비해 턱없이 촉박하다"고 평가하며, 보건복지부,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소아청소년과 관련 학회, 의협 공제조합 등 보험 전문가가 참여하는 상설 협의체 구성으로 충분한 준비를 요청했다.
해외 사례도 제시됐다. 일본은 분만 관련 중증 뇌성마비 아동에 대해 국가가 사실상 100% 재정을 부담하는 무과실 보상제도를 운영하며, 대만 역시 정부 예산으로 분만사고 구제 프로그램을 시행해 소송을 대폭 줄이고 전공의 확보율을 높였다. 김 회장은 "단순히 보험료를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국가가 환자와 의사 모두를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이번 지원은 무너지는 분만 인프라를 지탱할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며 "정부가 제안한 방안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보장 한도와 지원 대상을 현실화하고 추진 일정을 재조정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일본과 대만처럼 무과실 보상제도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이번 계획이 제대로 보완된다면 산부인과의 붕괴를 막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 모든 산모와 아기가 안전하고 수준 높은 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재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이는 특정 직역 보호를 넘어 모자보건의 근간을 지키는 국가적 책무"라고 못박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