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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는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영역이지만, 최근 의료윤리 위반 사건과 사회적 비판이 잇따르며 제도적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이에 의료계는 법과 제도의 통제를 넘어, 자율규제를 통한 새로운 전문성의 틀을 모색했다.
9일 열린 제42차 대한의사협회 학술대회에서 전문가들은 '의사자율규제와 전문직업성'을 주제로, 윤리·평가·면허 관리의 세 축을 하나로 통합하는 개혁 방향을 논의했다.
핵심 메시지는 분명했다. 의사의 자율규제는 통제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와의 약속이며, 전문직으로서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이화의대 의학교육학교실 권복규 교수는 의사윤리를 '개인의 인성'이 아닌 '직업적 표준'으로 규정했다.
그는 "의사의 윤리는 개별 인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의사다운 태도와 기본적으로 준수해야 할 직업윤리, 즉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을 뜻한다"며 "모든 의사가 공감하고 익혀야 할 기본적 역량이자 전문직의 스탠다드"라고 말했다.
이어 "프로페셔널리즘은 환자와 사회의 신뢰를 형성하는 기반이며, 신뢰가 의사의 자율성을 허락할 수 있는 근거"라며 "결국 의사의 자율성이 의권의 기초"라고 강조했다.
그의 발표는 의협 중앙윤리위원회의 구조개편 제안으로 이어졌다. 현행 중앙윤리위원회는 회원 등에 대한 자격심사와 징계에 관한 사항은 있으나, 회원의 윤리의식 제고와 연구, 의사윤리강령 및 윤리지침 제안, 윤리 교육, 자문 기능은 미흡하다.
따라서 '윤리위원회'와 '재정위원회'로 이원화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권 교수는 "윤리위원회는 윤리 쟁점 연구와 지침 개정, 교육과 홍보를 담당하고, 징계는 재정위원회가 맡는 구조가 바람직하다. 이 경우 시·도지부 윤리위원회의 역할 재정립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또 "윤리위원회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전담조직을 신설하고 연구·교육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며 "대국민, 대관, 대언론 홍보 기능을 강화해 윤리위원회의 존재 이유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의협 한진 법제이사는 '전문가평가단 시범사업'을 통해 자율규제가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의료윤리 위반이나 강력범죄 사례가 늘면서 의사단체의 자율징계권 강화가 가장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의협이 추진하는 면허관리 제도는 적발과 처벌이 아니라 예방과 질 향상에 초점을 둔다.
한 법제이사는 이를 "국민의 건강권과 의사의 자율권을 함께 보장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전문가평가단 시범사업은 2019년부터 12개 시도의사회가 참여 중이다. 의사 품위손상행위, 비윤리적 진료, 사무장병원·불법의료생협 등을 평가 대상으로 삼아 지역 의사들이 직접 현장조사를 진행한다.
이를 통해 공정하고 전문적인 신속한 민원처리, 의료인 폭언·폭행 방지, 불법 의료광고 예방, 자율징계를 통한 면허관리 제도의 근거 마련 등 다양한 성과를 얻었다.
다만 한 법제이사는 "'주의'와 '행정처분의뢰' 사이의 징계 간극이 큰 만큼 재발방지 서약서 등 다양한 징계 수단이 필요하다"며 "전담부서 신설과 예산 확보, 복지부와의 협력체계 마련, 전문가평가단의 자체 조사권 확보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어 "보건소가 개인정보보호법 등을 이유로 민원 자료 제공이나 공동 조사 요청에 협조하지 않는 현실도 문제"라며 "이 같은 한계를 해소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의협 신기택 기획이사는 자율규제의 철학적 토대를 짚으며, 제도적 완성으로서 '대한 의사 면허원' 설립을 제안했다.
그는 "의료는 사회적 신뢰와 직결된다. 법적 규제만으로는 현장을 담아낼 수 없다"며 "전문가 집단이 스스로 기준을 설정하고 관리하는 자율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율규제의 철학을 '사회계약론', '공동체적 연대', '탁월성(Excellence)' 등의 개념으로 풀어냈다.
신 기획이사는 "자율규제는 사회와의 신뢰 계약이며, 동료 간의 연대에 기반한 자기규율이다. 더 높은 기준을 스스로 세우고 개선을 반복하는 것이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꼽았다.
신 기획이사는 복지부·지자체·의협으로 분산된 면허관리 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대한 의사 면허원' 설립을 주장했다.
그는 면허원은 면허 등록과 교육 및 연수, 전문직업성 개발을 담당하고, 중앙윤리위원회는 징계와 자격심사, 전문가평가단은 사례 발굴, 조사, 처분 의뢰 기능을 맡는 '3축 자율규제 모델'을 구상했다.
신 기획이사는 "윤리위원회와 전문가평가제, 의사면허원이 각각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며, 글로벌 표준에 적합한 의사 양성과 인력 교류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며 "형사 사법 리스크에 대응하고, 의료배상보험율 할인이나 면허 이력 관리의 편의성 등 다양한 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논의된 세 축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윤리위원회가 '원칙·기준'을 세우고, 전문가평가단이 '실행·점검'을 맡으며, 면허원이 '제도·관리'를 담당하는 구조다.
신 기획이사는 "자율규제는 사회와의 신뢰, 그리고 약속이다. 대한 의사 면허원 설립은 그 약속을 제도화하는 필수 과제다. 전문직의 사회적 책무를 강화하고, 국민 앞에서 책임지는 협회의 비전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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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으뜸 기자
acepark@medip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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