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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크기를 둘러싼 논란은 반복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의료계는 의사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에도 지역과 필수의료 분야의 불균형이 여전히 핵심 문제라고 지적한다. 문제의 본질은 총량이 아니라, 의료 인력이 실제로 어디서 어떻게 일하고 있느냐다. 단순 증원은 인기과 쏠림을 심화시킬 뿐이며, 정원 확대나 단기 배치 조정만으로는 의사인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의사인력 수급 추계는 OECD 비교 데이터, 근로시간, 의료기술 변화 등 복합 요인을 함께 고려한 장기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근로시간', 의사인력 추계의 첫 단추
12일 의료정책연구원이 개최한 '의사인력 수급 추계에서의 새로운 쟁점' HRH(Human Resources for Health) 컨퍼런스에서 이정찬 부연구위원은 "의사 근무시간 자료는 인력정책의 기반이자 FTE(Full-Time Equivalent, 전일제 환산근로자) 계산의 출발점"이라며 근로환경 개선, 인권 보호, 환자 안전, 의료시스템 효율 향상 모두가 근무시간 분석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2016년과 2020년 전국의사조사(KPS) 데이터를 인용하며, 진료의사의 연간 근무시간이 2016년 2408시간, 2020년 2260시간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또한 올해 9월 25일부터 10월 17일까지 대한의사협회 회원 138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의료정책연구원 자체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한국 의사의 연간 근무일수는 292.6일, 연근무시간은 2301시간으로, 주 6일 이상 근무하는 의사가 71.6%에 달했다. 토요일 근무 79.6%, 일요일 근무 19.8%, 공휴일 근무 34%로 주말·공휴일 근무가 일상화된 구조였다.
이 부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의사의 근무시간은 직업 특성상 주말 및 공휴일 근무, 야간 진료가 이어져 일반 근로자보다 길다"며 "따라서 일반 근로자가 아닌 의사 직역의 특성이 반영된 근무일수와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한 추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근무시간을 정확히 파악해야 의사인력 추계의 기초가 마련된다"며 "미국 보건자원서비스청(HRSA)은 의사 수요·공급을 FTE 단위로 추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다양한 자료원을 확보해 HRSA 수준의 의료인력 수급 시뮬레이션 모델(Workforce Simulation Model)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의료 AI', 의사인력 추계의 새 변수
의료정책연구원 임지연 책임연구원은 이를 '의료 생산성의 재정의'라고 봤다. AI로 인한 생산성 향상은 단순한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의료의 질, 접근성, 정확성, 환자 경험까지 개선하는 총체적 가치 증진이라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의사의 업무 시간을 줄이는 동시에 진료의 질과 환자 안전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임 책임연구원은 "의료 AI는 의료 데이터를 학습해 질병을 진단·관리하거나 예측하며, 의료인의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의료 인공지능은 현재 의사 인력 추계의 변수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다. 정책이 여전히 '인적 노동력' 중심으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2023년 미국의사협회는 'AI 개발·배포·사용에 대한 정책 원칙'을 마련하고, 인공지능을 의사의 역할을 보완 및 확장하는 증강지능으로 개념화했다. 미국 의료계는 업무 부담 완화와 효율성 측면에서 AI 도구의 유용성에 대한 인식을 넓혀가고 있다.
임 책임연구원은 "전 세계가 고령화와 의료비 증가의 부담 속에서 AI를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 행정 효율성 증대의 도구로 보고 있다"며 "한국 역시 의료 인력정책의 핵심 변수로서 의료 AI를 다루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전문의·지역 불균형, 총량 중심 접근 탈피해야
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 김석일 교수는 "정부의 의사 수 추계가 전체 의사 총량 중심으로만 이뤄지고 있다"며 "전공의 정원 조정이나 지역 불균형 해소를 위한 근거 자료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부족한 분야는 증원으로 해결하겠다고 하지만, 초과된 분야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다"고 꼬집었다.
전문의 유입·유출과 근무형태(FTE) 등 기초 자료의 확보가 어렵고, 전문과별 환자 구성과 의료서비스 방식의 차이도 커서 모형화가 쉽지 않다. 현재는 일부 과목만 학회나 기관 단위의 부분적 추계에 머물고 있으며, 질환 구조에 따른 수요 변화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김 교수는 국가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역시 지역 의료 수요를 충족시킬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보건의료기본법 제4조는 국가와 지자체가 국민의 건강 보호와 증진을 위해 필요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모든 국민이 형평에 맞게 기본적인 보건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어 보건의료 시책상 필요하다면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김 교수는 "결국 지역 의료 수요에 대한 대책은 중앙정부가 아니라 각 지자체가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문과별 수요와 지역별 분포가 문제인데, 해결은 전체 의사 수로만 하겠다는 건 잘못된 접근"이라며 "가장 정확한 추계는 각 분과·전문과가 이미 체감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큰 틀을 잡되, 지자체가 지역별 의료 인력 수요를 분석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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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으뜸 기자
acepark@medip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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