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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GLP-1 유사체의 등장으로 비만치료제 시장이 빠르게 확대되면서, 비만을 대사질환으로 인식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하지만 진단 기준과 보험 제도는 여전히 과거의 틀에 머물러 있다. 체질량지수(BMI) 중심의 단순한 판정 기준은 복합질환으로서의 비만을 설명하기 어렵고, 급여화 논의 역시 근거 마련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글로벌 비만치료제 시장은 그야말로 폭발적이다. 일라이 릴리의 GLP-1/GIP 이중작용제 '티르제파타이드(마운자로, 젭바운드)'는 2025년 3분기 매출만 14조원을 기록하며, 글로벌 매출 1위 약물이던 MSD의 항암제 '키트루다(펨브롤리주맙)'를 제쳤다. 이는 비만 치료가 글로벌 의약품 시장의 중심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대한비만연구의사회는 주사제에 이어 경구제, 월·분기 제형 등 복약 편의성을 높인 다양한 제형이 개발되며 시장이 구조적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2일 대한비만연구의사회 제37회 추계학술대회 기자간담회에서 이철진 회장은 "비만약 하나만으로도 2030년엔 100조원 매출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며 "후속 약물들은 근감소를 최소화하고 약효 지속 시간을 늘리며, 복약 편의성과 복합 효과를 동시에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보다 개선된 약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이 시장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의사회는 GLP-1 제형의 확산이 '살을 빼는 약'이라는 기존 인식을 넘어, 비만을 치료해야 할 질환으로 보는 인식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노보노디스크의 '위고비(세마글루타이드)'에 이어 '마운자로'가 등장하면서 국내 비만치료제 시장은 양분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의사회는 단순한 점유율 경쟁이 아니라, 작용기전의 진화가 만든 세분화된 치료 접근에 주목하고 있다.
이철진 회장은 "티르제파타이드가 나왔다고 해서 세마글루타이드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라며 "두 약물은 리셉터 작용 방식이 다르고, 세마글루타이드는 심장·신장 질환 등 동반질환 개선 효과를 독자적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마글루타이드의 저용량 경구제가 연말 알츠하이머 임상 결과를 발표할 예정인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의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만치료제의 적응증은 성인을 넘어 청소년으로 확대되며 진료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10월 '위고비 프리필드펜'을 12세 이상 청소년의 체중 관리 보조요법으로 승인했다. 국내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허가된 첫 GLP-1 제형으로, 청소년 비만 관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철진 회장은 "그동안 소아청소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비만 치료제가 거의 없었다"며 "세마글루타이드의 허가는 현장 의사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변화"라고 말했다.
의사회는 연령과 진료과를 아우르며 비만치료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치료 접근이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돼야 한다고 바라봤다.
비만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논의도 본격화됐다. 단순히 체질량지수(BMI) 수치로 진단하는 체계는 복합대사질환으로서의 비만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대한비만연구의사회 안상준 정책이사는 "비만은 복합적인 질환인데, 이를 BMI만으로 진단 내리는 것이 맞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됐다"며 "비만을 단순히 수치로만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비만연구의사회는 올해 란셋(Lancet)이 발표한 비만 진단 프레임워크를 토대로 국내 현실에 맞는 기준을 검토 중이다.
란셋 프레임워크는 체중과 키를 이용한 BMI뿐 아니라, 동반질환과 연령 등 다양한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특히 '임상 비만(clinical obesity)'과 '임상 전 비만(pre-clinical obesity)'의 개념을 제시해, 비만을 정밀하게 구분하는 접근을 제안했다.
비만연구의사회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약 2만6000여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국형 진단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안 정책이사는 "비만을 단순 BMI로 구분하기보다, 동반 질환과 연령별 위험도를 반영한 '임상 비만' 개념으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비만 진단 기준이 여전히 서양의 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청소년의 경우 BMI 30 이상으로 치료제 허가가 이뤄졌지만, 한국인의 체형 특성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높은 기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철진 회장은 "서양의 기준을 한국에 대입하면 BMI 26~27 수준에서도 이미 비만 범주에 해당한다"며 "국내는 연령이 낮을수록 BMI 기준이 더 낮아져야 하지만, 여전히 일률적으로 30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회 차원에서 한국형 비만 진단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비만치료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미용 목적의 사용이 늘어나는 부작용도 언급됐다.
이에 대한비만학회는 실제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보험 적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근거와 제도적 기반은 아직 미흡하다.
이철진 회장은 "약값이 워낙 비싸 전체 비만환자를 대상으로 한 보험 적용은 시기상조"라며 "병적 비만의 임상적 정의와 적용 기준이 먼저 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용 목적의 수요와 임상적 치료 대상을 구분하기 어렵고, 정부와 의료계 간 신뢰가 충분하지 않다"며 "건강보험 재정 외 별도 재원으로 추진된다면 찬성하지만, 단순 정책 통제 수단으로 활용돼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대한비만연구의사회 김민정 이사장도 같은 의견을 보탰다.
그는 "비만 환자에게 보험을 적용하는 것은 이상적이지만,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며 "비만 진료는 이제 모든 진료과가 함께 다뤄야 할 주제이며, 실제 환자의 70~80%를 개원의가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급여화 논의가 본격화되면 현장의 목소리가 반드시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 재정 여건상 단기간 내 급여화가 쉽지는 않지만, 향후 논의 과정에선 전문가 단체가 적극 참여해 합리적 기준과 사회적 컨센서스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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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으뜸 기자
acepark@medip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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