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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법안은 ▲응급의료기관이 응급환자 이송자와의 통신을 위한 전용 '수신 전화번호(핫라인)'를 개설·운영하고 ▲수용 능력 확인에 필요한 사항을 중앙응급의료센터에 통보하도록 하며, 이를 하지 않거나 허위로 보고할 경우 의료기관 평가에 반영하도록 규정했다.
대한의사협회 김재연 법제이사는 "정부의 재정적·물류적 대응이 모두 작동하지 못한 결과, 한국의 응급의료 시스템은 실제 붕괴 국면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응급의료의 위기는 체감이 아닌 수치로 드러난다. 2023년 5만8520건이던 '응급실 수용곤란 고지' 건수는 2024년 11만33건으로 1년 만에 88% 급증했고, 올해 8월까지 누적 8만3181건이 보고됐다. 구급대의 병원 도착 30분 초과 이송 비율도 2023년 1.9%에서 올해 상반기 5.4%로 늘며 3년 만에 3배 가까이 뛰었다.
그는 "이 문제는 단순한 병상 부족이 아니라 뇌동맥류 수술, 심근경색 스텐트, 중증외상 개복술 등 '최종 치료'를 담당할 배후 진료과 전문의가 사라진 구조적 붕괴"라며 "현장은 배후 진료과가 눈에 보이게 무너지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는 재정과 물류 두 축의 대책을 병행했지만, 김 이사는 "두 정책 모두 구조적 모순에 갇혀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의사 집단행동에 따른 비상진료체계 유지를 위해 10개 항목의 한시적 건강보험 지원책을 운영해왔다. 그러나 보건의료 위기경보가 '심각' 단계에서 해제되면서, 대부분의 지원이 종료되거나 조정됐다.
이 과정에서 '지역 응급실 진찰료 별도 보상'과 '수용곤란 중증환자 배정 보상' 등 주요 항목이 사라졌고, 10개 중 단 두 항목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 가산'과 '응급·중증수술 가산'만이 '공공정책수가'로 정규화됐다.
김 이사는 정부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 오히려 구조적 한계와 정책 사각지대를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특히 '지역 응급실 진찰료 별도 보상' 폐지는 "정부가 지역 응급의료의 가치를 축소 평가한 신호"라고 했다.
그는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 가산과 응급·중증수술 가산이라는 '핀셋 보상'이 준비(Readiness) 비용이 아닌 활동(Activity)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전문의 배치 기준 강화'를 내세웠지만, 병원이 24시간 대기 인력을 유지하기 위한 고정비는 보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이사는 "정부의 '핀셋 보상'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목 아래 이미 붕괴 중인 지역 응급의료 지원을 축소하고, '응급실 뺑뺑이'의 지역 편차를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며 "환자가 와야만 수가가 발생하는 구조는 환자가 적은 중소병원과 지방 응급의료기관에 불리하고, 결국 대형병원 중심의 지원 체계를 고착화시킨다"고 덧붙였다.
물류 대응책 역시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정부는 2023년부터 '응급실 수용곤란 고지 관리 표준지침'과 '이송지침'을 배포했지만, 이후 수용곤란 고지 건수는 오히려 폭증했다.
김 이사는 "이 지침이 법적 구속력을 전혀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상위법인 응급의료법에 병원의 '수용 의무(Duty to Accept)' 조항이 없는데, 하위 지침이 강제력을 가질 수는 없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이를 '사법 리스크'로 인식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은 병원이 '책임'을 지고 환자를 받으라는 '부드러운 통제'지만, 실제 의료진은 '법적 책임'이라는 현실에 놓여 있다.
김 이사는 "배후 진료 역량이 없는데 환자를 수용했다가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병원과 의사가 모든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수용하라'는 지침은 곧 '법적 위험을 감수하라'는 명령으로 들린다"고 말했다.
결국 병원들은 법적 방어 수단으로 '수용곤란 고지'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됐고, 정부의 이송지침은 현장 혼란을 오히려 키웠다.
김 이사는 응급의료 체계 정상화를 위해선 지침이 아닌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응급의료법에 정당한 사유 없는 수용 거부 금지 조항을 신설하되, 동시에 의료진의 사법 리스크를 완화하는 '선의의 응급의료 면책특례법(가칭)'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수용곤란 고지를 남발하는 기관에는 제4차 응급의료 기본계획 평가와 연계해 페널티를 부과해야 한다"며 실효성 있는 통제 장치 마련을 요구했다.
재정 부문에서도 '활동 보상'이 아닌 '준비 보상' 중심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 이사는 "응급실이 돌아가려면 병원이 필수의료 전문의를 24시간 고용·대기시키는 준비 비용(Readiness Cost) 자체가 보상돼야 한다"며 "정부는 '필수의료 네트워크 참여 보상금'이나 '상시 대기 전문의 인건비 지원' 등 별도 공공정책수가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정부의 제4차 응급의료 기본계획은 방향은 옳지만, 전문의가 빠져나간 현실에서 실행은 불가능하다"며 "'선 인력 확보, 후 기능 재편'의 원칙이 바로 서지 않으면 이번 대책은 또 하나의 청사진으로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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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으뜸 기자
acepark@medip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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