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 사진=박으뜸 기자
대한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 사진=박으뜸 기자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응급실은 열려 있지만, 그 안의 의료진들은 더 이상 예전의 마음으로 버티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응급실 뺑뺑이 방지법'을 내세우며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만, 현장의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오히려 더 깊은 피로와 절망을 호소한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은 7일 열린 긴급기자회견에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강요받으면 배째거나, 하는 척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냉소 섞인 발언은 응급의료 현장이 짊어진 구조적 불합리를 단적으로 드러냈다.

'응급실 뺑뺑이'라는 표현은 응급의학과 의사들에게 상처로 남아 있다.

이 회장은 "응급실 뺑뺑이가 없는 나라는 없다. 만약 있다면 알려달라. 그 나라의 시스템을 그대로 들여오면 된다"며 냉정한 현실을 지적했다.

또 "응급 진료와 최종 치료는 구분돼야 하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비전문가들이 만든 제도는 현실을 왜곡시켰다"고 말했다.

응급의사회가 분노를 표출한 이유는 명확하다. 최근 통과되거나 발의된 '응급실 뺑뺑이 방지법' 등 응급실 관련 법안들이 현장의 의견을 배제한 채 의료진에게 책임만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 국회는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이 대표발의한 '응급실 뺑뺑이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응급의료기관이 응급환자 이송자와의 전용 '핫라인'을 개설·운영하고 ▲수용 능력 정보를 중앙응급의료센터에 통보하도록 규정했다. 이행하지 않거나 허위로 보고할 경우 의료기관 평가에 반영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이어 최근 더불어민주당 김윤 의원이 발의한 '응급실 이송·전원체계 개편을 위한 응급의료법 개정안'도 주목된다. 해당 개정안은 ▲이송·전원·최종치료 개념 정의 ▲응급환자 수용 불가 사유를 보건복지부령으로 규정 ▲구급대원 전화확인 절차 삭제 ▲수용불가 사전고지 제도 도입 ▲권역·지역센터의 24시간 2인 1조 근무체계 구축 등을 담고 있다.

의사회는 이러한 법안들이 환자의 불편 해소보다는 구급대원 민원 처리에 초점을 맞춘 보여주기식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이미 유사한 정책들이 여러 차례 시행됐다가 실패로 끝났고, 또다시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낭비될 것이란 시각이다.

응급의사회는 응급의료 정상화를 위해 법적 위험성의 감소, 응급실 과밀화 해소, 그리고 인프라 개선이란 세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했다.

이 회장은 "세 가지는 맞물린 문제로, 하나라도 빠지면 응급의료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먼저 법적 위험성이다. 응급의학 전문의는 응급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치료를 제공하더라도, 결과에 따라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에 놓여 있다. 응급의료는 시간과 불확실성의 싸움인데, 결과 책임까지 개인에게 묻는 제도는 현장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이 회장은 "응급 치료를 과실 없이 수행했다면 최종 치료의 결과와 관계없이 면책이 보장돼야 한다"며 "응급 치료와 최종 치료는 명확히 분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과밀화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응급실에 자리가 없다고 해서 과밀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응급실에 병상이 남아 있어도 환자를 옮길 병동이나 최종 치료 병상이 없으면 결국 새 환자를 받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의사회는 과밀화의 본질은 병상 부족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고 진단했다.

이 회장은 "경증 환자가 응급실이 아닌 다른 경로로 진료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며 "응급실은 경증 환자가 상급병원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회는 경증 환자의 상급병원 이용을 제한할 현실적 장치가 없으며, 응급실 내부가 아닌 외부 진료체계 전체를 조정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정리했다.

인프라 문제에 대해서도 현실적 대안이 언급됐다.

이 회장은 "취약지에 최종 치료 인프라를 세팅하겠다는 건 과욕이며, 예산과 인력 면에서 불가능하다"며 "중증환자를 언제든 수용할 수 있는 최종치료기관을 확보하고, 취약지는 이들과 연계되는 방향으로 인프라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응급의사회는 '직접 치료'보다 '연계 중심의 시스템'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덧붙였다.

이 회장은 "이 세 가지 논의가 선행돼야 응급실 뺑뺑이 논란이 줄어들 수 있다"며
"복지부에 여러 차례 개선안을 제시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무조건 환자를 받아라'는 법만 만들고 있다"고 꼬집었다.

응급의사회가 가장 강하게 비판한 것은 '전문가 배제'였다.

이 회장은 "응급환자 이송체계 개선 범부처 TF가 만들어졌지만, 우리를 부르지 않았다"며 "응급의학 전문의를 배제한 채 전문가 회의를 한다면, 그것은 전문성에 대한 무시"라고 반발했다.

그는 "내과 환자를 보더라도 내과 전문의의 영역을 인정한다. 그런데 응급의학 전문의를 배제한 회의에서 누가 전문가인가"라고 반문했다.

의사회는 이 같은 상황을 '비전문가의 탁상공론'으로 평가했다. "문제의 근본을 외면하고, 드러난 현상만 감추려는 접근으로는 응급의료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사회는 원인 분석과 재원 확보 없이 '모든 환자를 받으라'는 법을 만드는 것은
현장을 모르는 행정이라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응급실은 할 수 있는데 안 받는 게 아니라, 못 받는 것이다. 법적 책임을 지기 때문에, 인력과 병상이 부족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응급의사회는 정부에 ▲명확한 목표 설정 ▲국민 동의에 기반한 제도 설계 등을 요구했다.

이 회장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목표를 제시하고 국민의 동의를 얻는 일"이라며
"모르는 사람들이 정책을 만들다가 여기까지 왔다"고 호소했다.

응급의사회는 향후 전문가 중심의 논의체 구성을 통해 응급의료의 구조적 한계를 바로잡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회장은 "이제는 우리가 먼저, 국민과 함께 올바른 해결책을 정부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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