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검체 위·수탁 제도 개편을 둘러싼 의료계의 긴장은 11월 중순 절정에 달했다. 세종청사와 국회 앞에서 잇달아 열린 궐기대회에서는 "일차의료 붕괴"라는 구호가 이어졌고, 의료계는 개편 중단을 요구하며 정부와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나 국면은 17일 검체검사수탁인증관리위원회 3차 회의를 계기로 예상 밖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보건복지부가 회의 결과를 공개하면서 "대한의사협회가 대승적 차원에서 정부 방향을 존중한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보도자료에 명시한 것이다. 이 문구가 전해지자 의료계 내부 분위기는 순식간에 흔들렸다.
의료계는 지난 한 달 동안 개편안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10월 말 복지부가 제2차 위원회에서 보상체계·질 관리 개선안을 논의하자 의협은 이를 "일방적 강행"이라고 규정했고, 11일 세종청사 앞 집회에서는 개원가와 직역 의사회가 결집해 "위탁관리료 폐지는 생존권 붕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6일 국회 앞 궐기대회에서는 검체수탁 개편을 성분명 처방·한의사 X-ray 허용과 함께 '3대 의료악법'으로 묶어 총력 투쟁 의지를 천명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의협의 톤은 달라졌다.
복지부가 공개한 17일 검체검사수탁인증관리위원회 3차 회의에서 의협은 "개편 방향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며칠 전까지의 격화된 분위기와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표현이었다.
의협은 상호정산이 현실적이며 시장 자율계약 원칙은 유지돼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지만, 동시에 정책 논의의 틀 자체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내부 해석은 갈라졌다.
강경론은 의협의 발언을 사실상 후퇴로 받아들였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내줬다"고 잘라 말했다. 거리에서 '악행', '폭주'를 외치며 결집한 지 며칠 만에, 의협이 정부와 합의한 듯한 뉘앙스를 풍긴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 주신구 회장은 "복지부가 '건정심 한 달 연기'라는 사탕을 내주고 의협의 멘트를 받아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실은 의협과의 합의를 조건으로 가져오라고 압박하는데, 이번 발언으로 의협은 싸울 명분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의료계 인사도 정부의 태도를 문제삼았다. 그는 "의대정원 논란 때에도 정부는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당국자의 표현은 정책 강행을 위한 립서비스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싸울 생각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맞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신중론은 이번 발언을 전략으로 해석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상호정산 의지를 명확히 드러낸 만큼 분리청구 수용으로 볼 수 없다"며 "정책 상정 과정에서 최악의 결과를 막기 위한 포석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속상하더라도 지켜봐야 한다. 지금도 막기 위해 뛰는 분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 가운데 가장 강한 반발은 일차의료 직역에서 터져 나왔다.
대한내과의사회는 18일 성명서를 통해 "'대승적 차원', '존중'이라는 의협의 표현은 일차의료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내과의사회는 이번 복지부 발표를 "일차의료에 대한 사망 선고"라고 규정하며 의협 메시지가 현장과 동떨어져 있다고 꼬집었다.
내과의사회는 "검체검사 수탁인증관리위원회 논의에 내과·소청과·가정의학과 등 필수의료 직역의 의견은 단 한 글자도 반영되지 않았다"며 논의 과정의 정당성 자체를 문제삼았다.
또 "정부가 의협의 표현 일부를 교묘히 활용해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며 이를 "의료계를 파트너가 아닌 통제 대상으로 보는 행태"라고 분석했다.
만약 건정심에서 개편안이 강행될 경우 "복지부를 더는 국민건강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향후 모든 협력 사업에서 전면 불참하겠다"고 경고했다.
의료계 내부 해석이 갈리는 이유는 정부의 속도감 때문이다. 복지부는 위탁·수탁기관별 수가 신설과 위탁검사관리료 폐지를 내년 하반기 상대가치 상시 조정과 연계해 시행하겠다는 계획을 이미 못 박았다. 사실상 제도 골격이 완성된 셈이다.
또한 복지부가 최근 의협·개원의협·학회들과 잇달아 간담회를 열고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겠다"고 밝힌 점도 의료계에서는 경계 요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복지부는 의협의 톤 변화를 '전향적'이라고 평가했다.
보상체계 논의에 대해 의료계는 분명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사라지는 '관행적 할인 차액'을 대신해 합당한 보상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채혈·보관·검체 관리·결과 상담 등 의원에서 수행되는 행위는 모두 의료행위이기 때문에 합법적 수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건강검진 영역까지 분리청구가 확대될 경우 청구 시스템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결국 의협의 한 문장은 의료계 내부의 균열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전국의사 대표자 궐기대회 직후 등장한 이 발언은 개편 논의의 국면을 바꿔놓았고, 향후 몇 달간 정부의 추진 속도와 의료계의 전략이 충돌하는 복합 갈등이 이어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