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산부인과는 지금 '존립 위기'에 놓여 있다. 저출산이라는 구조적 환경에 더해 전공의 기피, 원가 이하 수가, 불합리한 사법리스크가 겹치면서 의료 현장의 기반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직선제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는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 명칭 변경과 수가 정상화, 그리고 사법리스크 완화가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사회는 산부인과를 '여성의학과'로 개명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산부인과 진료는 이미 출산·분만 중심에서 여성 전 생애 건강 관리로 무게중심이 옮겨왔지만, 여전히 '산부인과'라는 명칭은 임신과 출산에만 국한된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갱년기·골다공증·성 건강·예방검진 등 여성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다양한 진료 영역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청소년과 미혼 여성들 사이에서는 산부인과 진료에 대한 거리감과 기피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14일 직선제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 기자간담회에서 김재유 회장은 "산부인과에서 여성의학과로 명칭을 변경할 시 청소년, 미혼 여성, 중년 여성 등 다양한 연령대에서 산부인과 방문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예방적 진료와 건강관리 중심으로 역할을 확대하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회원 40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같은 흐름이 확인됐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60%가 명칭 변경에 찬성했으며, 이 중 73%는 '여성의학과'를, 27%는 '여성건강의학과'를 희망 명칭으로 꼽았다. 해외에서도 'Obstetrics&Gynecology'와 함께 'Women's Health'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고 있어, 산부인과 명칭 변경 논의가 단순히 국내 차원에 머무르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저수가 문제 역시 산부인과의 존립을 위협하는 대표적 원인이다. 낮은 수가와 과도한 규제로 인해 상당수 개원의가 필수 진료를 포기하고 미용·성형 진료로 전환하거나 아예 폐업을 선택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국민의 안전한 출산권과 필수의료 접근성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김 회장은 "정부가 비현실적인 병상 기준, 인력 규제, 원가 이하의 수가 구조를 강요하며 산부인과 의료기관의 생존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의사회는 기준병실 의무규정(다인실)을 폐지하고 산부인과의 1인실 확보를 유연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분만 및 제왕절개 수가를 국제적 수준으로 현실화하고, 분만실을 특수병상으로 지정해 정당한 수가를 신설해야 한다는 구체적 대안도 제시했다. 아울러 분만대기료 신설, 산과 초음파 7회 제한 폐지, 신생아실 입원료 인상 등도 개선 과제로 꼽았다.
진료 환경 개선을 위한 세부 요구도 이어졌다. 내과 대비 진료시간·소독·기구사용 부담을 반영한 기본진찰료 인상, 질강처치 전회 급여 인정 및 독립 산정 허용, PAP 검사 등 세포병리검사 검체 채취료 신설, 정맥혈·소변·질분비물 채취 보상, 임신·불임·모유수유·성상담 상담료 도입 등이 그것이다.
비급여 초음파와 진찰료 문제도 현장의 불만이 크다. 최근 건보공단 일부 지사가 독감 주사 투여일에 시행된 임산부 비급여 초음파를 '건강검진 비급여'로 해석해 당일 진찰료 환수 조치를 내렸으나, 의사회 항의로 환수는 취소됐다.
의사회는 산모 진찰 시에는 단순히 초음파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혈압 측정, 체중 관찰, 임신 경과 평가 등 필수적이고 고유한 진료행위가 반드시 포함된다. 그럼에도 비급여 초음파를 시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찰료가 삭감·환수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이다.
김 회장은 "비급여 초음파 시에도 진찰료를 온전히 인정해야 하며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분만 인프라 붕괴와 사법리스크
저출산 속에서 분만 병원 급감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3년 706곳이던 분만 가능 의료기관은 2023년 463곳으로 34.4% 감소했으며, 특히 의원급은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현재 전국 250개 시군구 가운데 72곳은 분만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수도권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원정 출산'이 일상화됐다. 실제로 성남 곽여성병원, 부산 정관일신기독병원, 광주 문화여성병원 등 지역 거점병원이 잇따라 폐업하며 지역 의료 기반이 붕괴되고 있다.
의사 인력도 빠르게 줄고 있다. 신규 산부인과 전문의 수는 2008년 177명에서 2023년 103명으로 감소했고, 전공의를 양성할 대학병원 교수진의 정년퇴임이 이어지면서 오는 2041년에는 현재의 31% 수준으로 급감할 전망이다.
김 회장은 "분만 환경은 갈수록 고위험화되고 있지만, 불합리한 사법제도와 과도한 리스크가 의사들을 분만실에서 내몰고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뇌성마비 신생아 사건에서 12억원 배상 판결이 내려지는 등 의학적 한계와 무관하게 책임이 의료진에게 전가되는 사례가 고착화되고 있다.
그는 "분만은 본질적으로 불가항력적 위험을 내포한 의료행위이다. 현재 구조에서는 의료진이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런 환경에서는 누구도 분만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의사회는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과 불가항력 의료사고 국가책임제 도입, 보상금 상향(현행 3000만원→10억원), 300병상 이하 종합병원 산부인과 설치 의무화를 촉구했다.
더불어 무혐의 판결을 받고도 인터넷 허위 정보 유포, 1인 시위, 병원 난동으로 인해 병원이 폐업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 의료기관 영업방해 근절 입법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이는 단순히 특정 의료기관 피해를 넘어 국가적 분만 인프라를 붕괴시키는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말했다.
의사회는 현재의 수가 체계와 규제 환경으로는 지역 분만실의 지속 가능성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원가 이하 수가 정상화와 필수의료 수가 대폭 인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회장은 "분만 인프라는 단순히 산부인과 한 과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국가 존립과 직결된 필수의료이다. 의료진이 소신껏 진료할 수 있어야 산모와 아기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저출산 해법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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