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약사에게 백신 접종을 허용하자'는 논의가 다시 불붙자, 의료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번 논쟁을 의료계는 단순한 직역 다툼이 아닌,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환자 안전의 문제로 바라봤다. 백신 접종이 단순한 기술 행위가 아니라 의료의 본질적 과정이라는 점에서 면허 질서를 뒤흔드는 시도라는 것이다.
의료법 제27조는 '의료인이 아니면 누구든지 의료행위를 할 수 없으며, 의료인도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료계는 이 조항이 국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적 장치라며, 약사가 접종을 맡는 것은 의료법의 근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라고 지목했다.
대한의사협회 김재연 법제이사는 "백신 접종이 단순한 주사 행위가 아닌, 문진, 접종, 이상 반응 관찰 및 응급 처치를 포괄하는 고도의 전문적 '의료행위'임을 명확히 하고, 의료법 제27조에 의거해 이는 오직 의료인만이 수행할 수 있는 배타적 영역임을 밝히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세 가지 과정 중 어느 하나라도 의료인이 아닌 자가 수행할 경우, 국민 보건위생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고 덧붙였다.
의료계는 이번 논의가 '접근성'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되고 있다고 일갈했다. 약국의 편의성만을 내세운 주장은 환자 안전을 도외시한 위험한 발상이며, 아나필락시스 쇼크와 같은 응급상황에서 약국의 대응 능력은 사실상 부재하다고 비판했다.
코로나19 백신 안전성 연구센터 분석에 따르면, 접종 후 24시간 내 아나필락시스 발생 위험도는 3.15배 높아졌으며 실제 발생률은 백만 건당 1.45건으로 보고됐다. 이를 인구 5천만명에 대입하면 매년 약 72명이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의료계는 이런 응급상황에서 신속한 대응을 위해 에피네프린 투여, 산소 공급, 기도 확보 등 전문적 처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약국은 응급장비나 인력, 시스템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약국은 판매와 조제를 위한 공간에 불과해 산소 공급 장치, 정맥 수액 세트, 제세동기, 침상 등 기본적인 응급 환경이 미비하므로 119가 도착하기 전까지의 공백 동안 환자가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김 법제이사는 "증상은 대부분 접종 후 30분 이내에 발생하며, 갑작스러운 호흡곤란, 혈압 저하, 의식 소실 등으로 이어져 수 분 내 사망에 이를 수 있다"며 "단기 교육을 받은 약사가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정맥로를 확보하고, 산소를 공급하며, 에피네프린 추가 투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건 위험한 착각"이라고 말했다.
의료계는 이번 사안을 단순한 법 해석이 아닌 '의료체계의 신뢰와 역사'의 문제로 봤다. 그간 약사회는 대체조제, 공적 전자처방전, 방문약사제도, 자살예방상담 참여 등에서 반복적으로 의료인의 전문 영역을 넘나들어 왔고, 이런 시도가 직역 간 신뢰를 약화시키며 의약분업의 대원칙을 흔들어 왔다고 진단했다.
공적 전자처방전의 경우 의협은 해당 시스템이 약사의 임의적 대체조제를 가능하게 만들어 의사의 처방권을 훼손할 수 있다고 분명히 했다. 방문약사제도 또한 "약사가 임의로 환자의 의약품 투약에 개입하고 의사 본연의 일인 처방에 간섭하는 불법 의료 행위"이며, 약사가 자살 고위험군을 상담하는 사업에 대해서도 "비전문가가 어설프게 개입할 경우 환자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의료계는 이런 일련의 사례가 단순한 정책 참여를 넘어 약사회가 의사 고유 업무를 확대하려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2021년 의협 의료정책연구소 조사에서도 의사 회원의 97.2%가 대체조제 활성화에 반대했고, 그중 38.4%는 '약사의 대체조제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의료계는 이 결과가 감정적 대립이 아닌, 약사의 임상 판단 능력에 대한 구조적 불신을 드러낸다고 해석했다.
김 법제이사는 "약사 백신 접종 주장은 이러한 월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가장 위험하고 노골적인 시도"라며 "이는 단순히 하나의 업무를 넘겨받는 문제가 아니라, 면허제도의 근간과 의약분업의 대원칙을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꼬집었다.
해외 사례를 근거로 한 약사회 주장에 대해서도 의료계는 '한국적 특수성'을 외면한 단편적 논리라고 반박했다. 미국·캐나다 등은 광활한 영토와 의료 사각지대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약사 접종을 도입했지만,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접근성을 갖춘 한국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OECD 통계에 의하면 한국 국민의 연간 외래 진료 횟수는 14.7회로 회원국 중 1위다. 국민이 의사를 만나기까지의 평균 거리 역시 미국(3.39km), 캐나다(9.83km)에 비해 훨씬 짧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전국 1만6천여 개 위탁의료기관이 단기간에 대규모 백신 접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점도, 기존 의료 시스템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입증한 사례로 꼽힌다.
김 법제이사는 "미국 등 해외 사례는 광활한 영토와 의료 사각지대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접근성을 갖춘 한국의 현실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며 "검증되지 않은 제도를 무리하게 도입하면 안정적으로 작동 중인 시스템에 불필요한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는 결국 약사 백신 접종 허용 주장을 '국민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한 실험'으로 규정했다. 법적으로는 무면허 의료행위에 해당하고, 임상적으로는 응급 대응이 불가능하며, 제도적으로는 면허 질서와 의약분업의 원칙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법제이사는 "정부와 국회는 '접근성'과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허울 좋은 구호에 현혹되지 말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라는 보건의료의 최우선 가치를 직시해야 한다"며 "각 전문직이 면허 범위 내에서 최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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