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파국'으로 치달았던 국내 보건의료가 또다시 '풍전등화'를 예고하고 있다. 의대정원 증원 사태로 빚어진 의정갈등과 '의료 파국'이라는 비극과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이제는 '의약분업 전면 재검토'라는 전례 없던 극단적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발단은 약국가에서 제기되는 '성분명 처방'과 '대체조제'다. 두 사안은 모두 의사 처방권과 깊게 관여돼있기에 국내 보건의료에 미치는 파급력은 상당하다. 현재 대체조제는 사후통보 방식에 심평원 정보시스템을 추가하는 약사법 개정안이 상임위인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한 상태이고, 성분명 처방은 수급불안정 의약품 대응 필요성을 계기로 제기된 후 관련 법안이 발의돼있다.
제3자인 정부는 전화와 팩스 외에 온라인 체계를 대체조제 사후통보 방식으로 추가해 의료기관과 약국 간 소통을 지원하기 위한 방침이며, 이미 시행규칙으로 시행되고 있어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에 있다.
또 제21대 대선 당시 더불어민주당에선 필수의약품 안정적 공급 방안으로 제한적 성분명 처방과 대체조제 등을 제시한 바 있다. 반면 이재명 정부가 지난달 16일 발표한 '12대 국정과제'에는 두 사안 모두 포함되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의료계에선 두 사안이 논의되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심기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성분명 처방 입법 시도는 의약정 합의 파기로 간주되며, 입법 강행 시 의약분업 제도를 재검토하고 선택분업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두 쟁점 사안으로 빚어진 의사와 약사 간 이번 강대강 충돌과 진통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조짐이다. 특히 여러 쟁점 사안들은 모두 보건의료 체계를 뒤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진행 경과는 제약업계 이목을 끌기에도 충분하다. 이에 의약사 간 첨예한 입장차와 향후 의약품 시장에 미칠 영향을 진단해본다.
[메디파나뉴스 = 조해진 기자] "성분명 처방은 단순히 처방과 조제 방식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국민에게는 합리적인 선택권 보장과 경제적 부담 경감이라는 국민 중심 보건의료 서비스 강화를, 국가적으로는 건강보험 재정 안정 및 의약품 안정적 공급체계 마련을, 사회적으로는 폐의약품 낭비 방지 및 환경문제 해소를, 보건의료 직능 간에는 상호 존중과 협력이라는 효과를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제도적 변화다."
권영희 대한약사회장은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열린 '국민의 조제약 선택권 확대를 위한 성분명 처방 한국형 모델 도입 정책 토론회'에서 이같이 말하며 성분명 처방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성분명 처방은 WHO가 약물에 부여하는 성분명을 중심으로 처방을 내리는 방식으로, 의약분업 이후 약사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제도 도입 필요를 요구해온 오랜 숙원 과제다.
약사사회는 제네릭 의약품은 오리지널 의약품과 동일한 성분으로 제조돼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생동성 시험)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므로, 성분명 처방을 하면 ▲수급불안정 상황에서도 원활한 대체조제 가능 ▲환자의 성분 인지 가능으로 의료진과의 소통 향상 ▲환자의 의약품 중복·과량 복용 방지 등 안전성 향상 ▲환자의 의약품 선택권 확보 ▲약품비 절감 및 건강보험 재정 효율화 ▲약가 경쟁 유도를 통한 의약품 시장의 공정 경쟁 촉진 등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와 함께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주요 선진국은 이미 성분명 처방이 보편화 돼 있으며, 일본 역시 정부 주도로 제네릭 의약품에 대한 신뢰를 높여 사용 비중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세계적 추세 등 여러 근거를 꾸준히 제시하며, 지속해서 성분명 처방 제도화를 위한 노력을 쉬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2007년 본격적으로 성분명 처방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수차례 공론화가 되기도 했지만 끝내 제도화라는 결실은 좌절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마스크, 백신, '타이레놀(아세트아미노펜)' 수급불안정 및 품절 문제가 불거지면서 대체조제와 성분명 처방에 대한 필요성이 인식됐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 종식 이후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던 의약품 수급불안정 및 품절이 오히려 더 많은 품목에서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은 그동안 물밑을 맴돌았던 성분명 처방이 정책 이슈의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의약품 수급불안정은 원료 공급 부족, 낮은 보험약가, 제약사 생산 라인 부족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하나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이에 즉각적으로 환자에게 필요한 약을 제공할 수 있도록 대응하고, 혼란스러운 약국 현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동일성분으로 '대체조제'를 하거나, 애초에 처방을 '성분명 처방'으로 진행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약사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고, 관련 정책 논의에 대한 추진력을 얻게 됐다.
높아지는 약사들의 목소리에 정부와 국회도 귀를 기울였다. 보건복지부는 '약사법 시행규칙' 일부 개정안을 입법예고 하고, 새로운 대체조제 사후통보 방식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업무포털 시스템을 추가해 기존보다 훨씬 간소화된 대체조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최근 국회에서는 수급 불안정 의약품에 대해 성분명 처방 의무화 내용을 담은 '성분명 처방 의무화' 법안이 발의되면서 일부 의약품에 대한 성분명 처방 제도화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이에 대한약사회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속담처럼 토론회를 통해 성분명 처방 한국형 모델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성분명 처방 추진을 향한 행동을 개진하고 있는 모습이다.
앞서 언급한 토론회에서 대한약사회와 의약품정책연구소는 성분명 처방이 단순히 약사 업무의 편의와 건강보험 재정 절감의 이점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약 선택권과 건강권을 향상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성분명 처방 한국형 모델을 제시했다.
성분명 처방 한국형 모델은 제품명 병기를 하지 않고, '[주성분 코드]+성분명+제형+함량'만을 기재한 처방을 의미한다.
성분명 처방 한국형 모델의 프로세스는 ▲의사가 성분명 처방 방식대로 처방전 발급→▲전산시스템이 건강보험공단 추천 의약품 목록, 약가, 본인부담 차등화 기준 등에 따라 후보 의약품 자동 선정→▲약 리스트 환자에 제공 후 약사의 설명→▲환자 선택에 따라 최종 조제 진행 및 성분명/제품명 기록→▲환자에게 성분명/제품명 병기된 복약지도서 제공 및 복약지도 진행→▲환자가 앱을 통해 조제 내역 공유 단계로 진행된다.
성분명 처방 한국형 모델을 개발에 함께한 김대진 의약품정책연구소장은 "성분명 처방을 통해 최대 7조9000억원의 약품비를 절감할 수 있고, 제품명 사용으로 인한 의약품의 사용 과오를 감소시킬 수 있다"며 "불필요한 약 처방과 리베이트 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낭비를 줄일 수 있고, 폐의약품 규모 역시 감소해 연간 최대 9조3614억원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성분명 처방 제도는 환자 안전과 권익을 강화하고, 국민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국내 의약품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왼쪽부터)김대진 의약품정책연구소장, 대한약사회 권영희 회장, 이광민 부회장. 사진=조해진 기자
토론회에 참석한 이광민 대한약사회 부회장 또한 "성분명 처방을 도입할 시 단골약국이 활성화돼 중복약 또는 금지약 관리를 강화하고, 환자 복약 이행도를 개선할 수 있다"고 환자의 지속가능한 건강관리가 가능해 환자 안전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피력하며 "환자 역시 거주지 인근 약국에서도 편리하게 조제를 할 수 있다"고 환자의 편의성 향상에도 기여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 부회장은 성분명 처방 제도화 움직임에 의사 단체의 강력한 반발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 "의사와 싸우고 싶지 않다. 성분명 처방은 정부 기관과 보건의료단체, 우리 사회가 함께 나서서 확대해 나가야 할 일이지 직능 간의 갈등 문제가 아니다"라고 직역간 갈등이 심화되는 부분을 경계했다.
권영희 대한약사회장 또한 "성분명 처방은 약의 선택권이 의사에서 약사에게로 이전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약물 복용의 체계적인 관리,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 등 미래 보건 의료 시스템을 준비해야 할 때"라며 "성분명 처방은 환자 자신이 복용하는 약의 성분을 알고, 국민의 알권리와 합리적이고 경제적으로 약을 선택하는 국민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국민 건강권의 실현"이라고 성분명 처방의 당위성에 대해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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