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K칼럼] 우리가 쓰는 약은 어디에서 왔을까 - 메페리딘

백승만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메디파나 기자2025-09-08 06:00

메페리딘(Meperidine)

1915년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전투 중 독가스를 사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사용한 독가스는 염소(chlorine) 가스. 참호에 숨어 있는 영국과 프랑스 군을 끌어내기 위해 독일군은 치명적인 무기를 꺼내들었다. 

연합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자신들도 독가스를 동원하기도 했고 방독면을 이용해 독가스를 막기도 했다. 여러모로 첨단기술이 난무하던 시기다.

독일군의 독가스는 이듬해에 더욱 진화(?)한다. 유황 겨자(sulfur mustard)를 들고나온 것이다. 19세기 후반 처음 만들었을 때만 해도 살상과는 전혀 상관없던 물질이다. 실험동물이 너무 많이 죽어서 실험을 수행했던 대학원생이 교수에게 실험 제대로 했냐며 잔소리까지 들었던 유황 겨자가 20세기 초반 전쟁과 함께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 무기는 기존의 염소 가스와는 다르게 호흡기 외에 피부를 통해서도 독성을 나타냈다. 방독면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신형 화학무기의 등장에 전장이 패닉에 빠졌다.

독일군의 독가스는 한층 더 위험해진다. 질소 겨자(nitrogen mustard)가 개발된 것이다. 분자 가운데 위치한 황을 질소로 바꾼 이 물질은 그렇지 않아도 기존의 화학무기에 비해 더욱 악랄한 무기였다. 연합군은 더 이상 참호 속에서 버틸 수 없었다.

정작 참호에서 먼저 나온 나라는 독일이었다. 동맹국이 일치감치 나가떨어진 전쟁에서 독일은 혼자만의 국력으로 버틸 수 없었다. 화학무기로 바꿀 수 없었던 전황이었다. 이후 독일은 패전국으로써 여러모로 굴욕적인 조항에 서명해야 했다. 화학무기에 대한 연구는 당연히 금지되었다. 이후 독일이 전쟁포로 학살을 위해 독가스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교전 중에 화학무기를 사용한 기록은 없다.

그렇다고 화학무기를 연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질소 겨자를 생산해 두긴 했다. 다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용하지 않고 만들기만 하면 짐밖에 안 되는 법.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악명을 떨쳤던 질소 겨자는 어느덧 창고 한쪽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었다.

이 물질에 제약회사가 관심을 쏟았다. 어쨌든 활성 자체는 좋은 물질 아닌가. 훗날 백혈병 치료제로도 쓰였던 물질이 질소 겨자다. 더군다나 구조가 간단하고 가격이 싸다. 언제나 연구비 부족에 시달리던 제약회사 연구원들이 질소 겨자를 출발물질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원들은 간단하게 확보가능한 출발물질과 질소 겨자를 반응시켜 화학적으로 연결하고, 에탄올과 산을 처리해 전혀 새로운 골격을 물질을 만들었다. 메페리딘이다.

메페리딘은 여러모로 신비한 물질이었다. 처음에 연구했던 목적은 부교감신경을 조절해 복통을 치료하는 목적이었다. 실제로 진통효과도 좋았다. 모르핀의 1/10 정도. 모르핀은 어쨌든 인류가 찾아낸 물질 중 손꼽히는 진통제 아닌가. 

다만 모르핀은 구조가 복잡해서 지금도 화학적으로 만들지 않고 양귀비에서 추출하는 물질이다. 대략 100년 전인 1930년대 후반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바다를 지배하는 영국, 대륙을 담당하던 프랑스에서 독일로의 양귀비 또는 아편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다. 모르핀은 전쟁 때 유용하게 사용하는 진통제다. 즉, 전쟁 물자로 변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나날이 도발 가능성이 높아지는 독일을 대상으로 규제를 가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약하기는 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물질이 하나 나온 것이다. 메페리딘의 화학 구조는 모르핀과 많이 다르다. 출발이 다르기 때문이다. 메페리딘은 화학무기, 모르핀은 양귀비 아닌가. 구조가 비슷할 리가 없다. 피페리딘이라는 핵심 골격은 어쩌다보니 동일하지만 다른 치환기나 골격은 많이 다르다.

그래도 구조가 뭐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활성이다. 모르핀의 1/10이라고는 해도 그럭저럭 괜찮다. 모르핀 자체가 워낙 좋은 진통제 아닌가. 독일 사람들은 새로운 진통제 메페리딘을 이용해 통증을 줄여나갔다. 참고로 메페리딘은 지금도 사용하는 약이다. 페치딘 또는 데메롤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다만 모르핀과 구조적으로 다르다고 해도 중독성을 나타내는 것은 똑같다. 그래서 마약류로 지정해 관리하는 의약품이다.

처음부터 모르핀 구조를 바꿔서 진통제를 개발하려면 전혀 다른 물질이 나왔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관점으로 개발한 의약품도 많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엉뚱한 물질이 나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신약 개발은 이래서 더욱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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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백승만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박사
- 전)美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 박사후연구원
- 현)경상국립대학교 약학대학장  
- '분자 조각가들', '대마약시대',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스테로이드 인류' 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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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시간 : 2025-09-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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