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기초연구 성과가 진료현장에 이르지 못하고 사장되는 문제는 의료계의 구조적 난제로 자리 잡았다. 개발된 기술이 진료현장에 도달하지 못하고, 임상에서 제기된 수요는 연구로 연결되지 못한 채 간극만 커지고 있다.
대한의학회는 이 문제를 '질문'에서부터 다시 짚기로 했다.
"대한의학회 중개연구센터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던 시도다."
이유경 정책이사의 말은 선언에 머물지 않는다. 실제로 지금껏 없던 구조를 실행에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의학회는 수요 도출, 연구 설계, 실용화 검토까지 전 과정을 의료현장과 함께 구성하는 새로운 형태의 중개연구센터(KAMS Translational Research Facilitating Center)를 지난해 출범시켰다. 기존과는 다른, 한국형 중개과학 구조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정책이사는 "의료 분야의 중개연구는 진료실이나 검사실, 수술 등의 현장에서 관찰된 문제, 즉 수요에서 출발해 이를 극복하고 대상자의 건강 개선을 추구한다"며 "약물이나 기기, 기술 등 모달리티를 개발하고 이를 진단이나 수술 등 실제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중개연구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 "기술보다 질문이 먼저"…기존과는 다른 출발점
기존의 중개연구는 연구자 중심이었다. 특정 기술의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 수요가 제시되고, 그에 맞춰 실험이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이유경 이사는 "수요조사에서 들어오는 현장수요에서 이미 '연구수요'의 의도를 강하게 담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짚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임상현장의 요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기술이나 연구 주제를 염두에 두고 구성된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현장 수요'라는 명목 아래 기술 중심의 발상이 개입되면서, 정작 임상에서 체감하는 핵심적인 문제나 질문은 가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A 특성을 지닌 환자에게 XYZ 기술을 적용하자는 방식은 기술 중심의 구상이다. 반면 임상에서 필요한 것은 'A 환자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진단하는 방법'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대한의학회는 기술 중심이 아닌 '임상 질문'에서 출발하는 구조를 택했다. 연구 주제를 정할 때도 단순히 기술 적용 가능성을 따지는 대신, '누구에게(P), 어떤 개입을(I), 어떤 효과를 기대하며(O)'라는 구조로 문제를 재정의한다. 연구의 출발점 자체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되돌린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임상현장의 핵심질문(key clinical question)을 중심에 두고 ▲대상군(P, target population) ▲개입방법(I, intervention) ▲성과(O, outcome)라는 구조로 수요를 정리했다.
◆ 기술이 아닌 '맥락'에서…임상 적용을 향한 설계
기존의 연구개발은 '기술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집중하면서 현장의 절차나 진료 흐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한계를 보여 왔다.
이 정책이사는 "모든 수요는 의료현장 맥락이 존재한다"며 "기술 구현을 통해 수요를 해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의료현장 안착으로 이어지긴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중개연구센터는 미충족의료수요를 나열하거나 기술 중심으로 해결하려는 기존 접근과 달리, 의료행위의 맥락 속에서 수요를 해석하고 이를 '사용 목적' 중심으로 전환(translation)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와 같은 전환 과정을 연구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의학회는 'CLUE 템플릿'을 자체 개발해 연구자들에게 공개했다.
◆ 과제 선정에서 끝나지 않는다…"진행에 개입"
대한의학회 중개연구센터는 실용화 가능성이 높은 과제를 선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별 과제가 실제 임상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전 주기를 관리하고 있다.
연구제안서에는 임상 수요 해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계별 이정표(마일스톤)와 구체적인 활용 방안이 포함되며, 이러한 계획을 토대로 신중한 선정 절차를 거쳐 실용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 연구팀이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센터는 과제 선정 이후에도 과제의 실용화를 전제로 한 구조적 검토를 지속한다.
개별 연구는 각 마일스톤 단계에서 임상적 유용성, 수용성, 규제·보험 진입 가능성 등 사전 검토가 이뤄지며, 필요 시 다학제 전문가와 함께 그룹 토의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도출된 내용은 연구 진행에 실질적으로 반영된다.
이러한 형태의 토의는 질환계협의체 컨퍼런스와 개별 연구팀 기술자문회의라는 명칭으로 수행되고 있고, 모든 연구팀은 매년 최소 2회 이상의 정기적 검토 과정을 갖게 된다.
센터는 시스템 전반에 PDCA(Plan–Do–Check–Act) 사이클을 도입해, 마일스톤 진행 단계마다 필요한 검토 항목을 대면 회의를 통해 점검하고 연구팀의 실행을 지원한다.
◆ 질환계 워킹그룹…이해상충 배제한 다학제 검토기구
이 구조의 중심에는 '질환계 워킹그룹'이 있다. 이는 대한의학회 산하 기간학회에서 추천한 내과계, 외과계, 지원계 전문가들로 구성되며, 연구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독립 검토기구다.
연구책임자나 연구원이 워킹그룹에 포함되는 것을 제한해 이해상충을 차단했고, 질환계 워킹그룹과 연구팀은 연간 2회 이상의 사고실험 형태의 회의를 3년간 반복하며 연구 방향성과 임상 적합성을 점검한다.
이 정책이사는 "워킹그룹에 의한 주기적이고 반복적 개입은 연구팀의 경험적 접근에 치우칠 가능성과, 임상 맥락을 무시한 기술중심 연구개발 위험성을 최소화시키는 아주 중요한 장치"라고 강조했다.
현재 중개연구센터는 6개 질환계 워킹그룹과 30개 과제팀을 운영 중이다. 정식 사이클이 아직 종료되지는 않았지만, 이번 시도의 의의는 '완성'이 아니라 '전환'에 있다.
이유경 정책이사는 "지금까지 1년 반 정도의 시도를 진행했으나 아직 한번의 싸이클을 제대로 흘려보지도 못했다"며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새로운 중개연구 모델의 구축과 안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자체로 비교적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전했다.
독자의견
작성자 비밀번호
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