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 현장을 봐달라"‥글로벌 진료지침과 제도의 엇박자

효과 입증된 글로벌 신약, 급여 제외로 환자 접근 막혀
크론병 경장영양식도 지원 축소…현장과 괴리 심화
의료계 "치료 기준보다 행정 판단이 앞서고 있다"

박으뜸 기자 (acepark@medipana.com)2025-08-07 11:59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글로벌 치료 흐름에 비해 국내 정책이 제도적으로 뒤처져 있다는 불만이 임상 현장에서 커지고 있다. 의료계는 "제도의 방향을 잡으려면 현장을 봐야 한다"며, 실제 환자를 진료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정책 결정 과정에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치료제 분야에서는 글로벌 흐름과 급여 체계 간의 괴리가 뚜렷하다. 대한뇌전증학회는 이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학회에 따르면, 국내 뇌전증 환자의 약 30%는 두 가지 이상의 약물로 발작이 조절되지 않는 약물 난치성에 해당한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전의 약제나 병용 요법이 필요하지만, 효과가 입증된 신약조차 급여 심사에서 탈락하거나 약가 협상에 실패해 비급여 상태로 남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해외에서는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치료제들도 국내에서는 제도적 장벽으로 인해 접근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UCB파마의 '빔팻(라코사미드)'은 약가 문제로 비급여 상태를 유지하다 2018년 시장에서 철수했고, '브리비액트(브리바라세탐)'는 국내 허가를 받았음에도 약가 협상이 결렬되며 출시되지 못했다. SK바이오팜의 '세노바메이트'는 2019년 미국 FDA 승인을 받은 이후 주요 국가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최근에서야 신속심사 대상에 포함됐다.

대한뇌전증학회 서대원 이사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은 "혁신 약물을 제대로 쓰려면 제도도 그에 맞게 갖춰져야 한다"며 "지금처럼 혁신의 가치를 무시하고 무조건 저가만을 고집하는 구조에서는 한국 시장에 신약이 들어올 이유가 없다"고 비판했다.

학회는 항발작약 신약의 조속한 도입을 위해 ▲패스트트랙(fast track) 제도 도입 ▲경제성 평가 방식 전환 ▲정책적 유연성 확보 등이 필요하다고 제언하고 있다.

이처럼 치료 전략이 명확히 제시돼 있음에도 국내에서는 제도와 급여 기준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의료계는 "국제적 근거보다 행정 편의가 우선되는 구조"라고 지적한다.

치료 보조 수단에서도 글로벌 권고와 배치되는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크론병 환자에게 사용되는 경장영양식(특수조제분유)은 단순한 영양 보충이 아닌, 염증 조절과 장 점막 회복, 성장 회복에 기여하는 치료 전략의 일부로 자리 잡아왔다.

이와 관련해 보건복지부는 1991년부터 희귀난치성 소화기 질환을 앓는 19세 미만 아동에게 특수조제분유를 지원해왔으며, 최초 신청 시 8주간 집중 치료 기간 동안 필요량 100%를 지원하고 이후 6개월마다 진료확인서를 제출하면 매달 30포(또는 액상형 60팩)를 추가로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4월부터 정부의 지원 제도는 오히려 축소됐다. 집중 치료 이후 추가 지원을 최대 1년까지만 허용한 것이다. 재발 환자조차 대상에서 제외된 셈이다.

ECCO(유럽 크론병 및 대장염학회) 가이드라인은 완전경장영양(Exclusive Enteral Nutrition, EEN)을 유도요법으로, 부분경장영양(Partial Enteral Nutrition, PEN)을 관해 유지 전략으로 제안하고 있다. 경장식을 약물과 병행할 경우 재발률을 낮추고 관해기간을 연장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근거도 다수 존재한다.

이 같은 가이드라인을 근거로 임상에서는 경장영양식을 중요한 치료 전략으로 보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진단 시점에서 시간이 경과한 환아에게도 전체 열량의 30% 이상을 PEN으로 보충하는 전략을 영양팀과 함께 계획해왔다.

세브란스병원 소아소화기영양과 이은주 교수는 "PEN 유지를 통해 생물학제제 추가 투약, 용량 증량, 입원이나 수술 같은 고비용 치료를 줄일 수 있어 오히려 전체 보건 재정 효율성을 높이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복지부의 최근 조치는 글로벌 흐름과는 다른 방향을 택하고 있다.

이 교수는 "진료 현장에서 고위험군 환자임에도 PEN을 병행하며 장기 관해를 유지하고 있는 소아 환자들을 다수 경험했다. 하지만 지원이 1년으로 제한되면서 환자 부담금이 급증했고, PEN 권고가 어려워진 현실"이라고 말했다.

복지부는 전문가 자문을 거쳐 결정한 정책이라 설명했지만 이 교수는 "실제 진료 현장의 소아소화기 전문의나 임상영양사와의 공식적 협의는 매우 제한적이었다"며 "초기부터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했다면 보다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조정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는 특정 치료 전략의 급여 여부나 지원 지속 여부를 판단할 때, 단기적인 재정 논리보다는 장기적 치료 효과와 사회적 비용 절감 효과까지 포함한 평가 체계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 교수는 "정책을 설정할 때에는 실제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들이 참여하는 공개적이고 투명한 논의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관련기사보기

크론병 치료 흐름 역행‥"경장식 지원 축소, 현실과도 괴리"

크론병 치료 흐름 역행‥"경장식 지원 축소, 현실과도 괴리"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크론병 환자에게 '특수조제분유(경장영양식이)'는 단순한 영양 보충제를 넘어, 관해 유도와 유지에 모두 기여하는 치료 보조수단이다. 단백질, 열량, 미량영양소를 균형 있게 공급해 체중 증가와 성장 회복을 돕고, 염증성 사이토카인을 줄여 질병 활성도를 낮춘다. 장내 병원성 미생물군 조절 및 장 점막 강화 효과도 보고돼 있다. 최근 글로벌 가이드라인은 경장식을 크론병 치료의 효과적인 전략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관해 유도뿐 아니라 관해 유지까지 확장된 치료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오히려 지

'코리아 패싱'에 막힌 뇌전증 치료‥국내 제약사가 돌파구로

'코리아 패싱'에 막힌 뇌전증 치료‥국내 제약사가 돌파구로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약물 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의 치료는 한동안 '정체' 그 자체였다. 글로벌 신약이 비급여 상태로 방치되거나, 약가 협상 실패로 결국 국내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일선 의사들은 이 같은 '코리아 패싱'의 책임이 정부의 무조건적인 '저가 약가 정책'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국내 제약사들이 개발한 제네릭과 신약이 잇따라 출시를 앞두며, 그나마 숨통이 트일 조짐이 보이고 있다. 외면받았던 한국 시장에 국내 개발 약물이 '구원투수'로 등장한 셈이다. 전체 뇌전증 환자의 약 30%는

수면장애 국가지원 사각지대…'코리아 패싱'에 환자 부담 가중

수면장애 국가지원 사각지대…'코리아 패싱'에 환자 부담 가중

[메디파나뉴스 = 김원정 기자] 수면장애 치료를 위한 다양한 신약이 개발되고 효과가 입증된 치료제도 존재하지만, 국내에서는 보험 적용이 제한적이며 글로벌 제약사의 '코리아 패싱' 현상까지 겹치고 있다. 이로 인해 수면장애 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실질적인 정책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4일 대한수면연구학회 임원진과 패널은 '2025 세계 수면의 날(World Sleep Day)'을 맞아 개최한 심포지엄 및 미디어 간담회를 통해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며, 환자들이 보다 원활하게 치료받을

이런 기사
어때요?

실시간
빠른뉴스

당신이
읽은분야
주요기사

독자의견

작성자 비밀번호

0/200

메디파나 클릭 기사

독자들이 남긴 뉴스 댓글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