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대한영상의학회 최준일 정책연구이사, 정승은 회장, 이충욱 보험이사, 박성호 편집이사. 사진=박으뜸 기자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정부가 필수의료 강화를 외치고 있지만, 영상의학은 여전히 제도 밖에 머물러 있다. 10년 넘게 이어진 수가 인하는 전문의의 노동 가치를 반토막 내고, 판독료와 촬영료가 뒤섞인 구조는 의사의 몫을 지워버렸다. 병원은 줄어든 수익을 메우기 위해 검사를 늘렸지만, 그 결과는 과잉검사와 환자 안전 위협으로 되돌아왔다.
여기에 노후 장비는 방사선 노출 위험을 키우고, 비수도권 대학병원에서는 교수진마저 빠져나가 교육과 진료의 공백이 커지고 있다. 산업 발전만을 앞세운 의료AI 정책은 안전성 검증도 없이 현장에 들어와 또 다른 불안을 낳고 있다.
대한영상의학회가 24일 기자간담회에서 "더 이상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 없다"며 근본적 개선을 촉구한 이유다.
수가 왜곡과 노후 장비, 남겨진 그늘
영상의학과의 소외는 가장 먼저 수가 구조에서 확인된다. CT와 MRI를 비롯한 주요 영상검사는 2010년대 초반부터 큰 폭의 인하가 반복됐고, 선택진료비 폐지 과정에서도 보완책을 받지 못했다. 이후 상대가치 개편과 종별 가산 축소까지 이어지면서 현재 영상검사의 가치는 과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낮아진 수가는 병원으로 하여금 수익을 메우기 위한 검사를 늘리게 만들었고, 장비 가동률이 높아질수록 원가는 낮아져 또다시 수가 인하가 단행되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최준일 정책연구이사(서울성모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수가가 낮아지면 검사를 늘리게 되고, 장비 가동률이 오르면 복지부는 다시 수가를 내리는 식의 사이클이 몇 차례 반복됐다"며 "지금 영상검사 수가는 사실상 2010년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구조는 결국 환자에게 불필요한 검사를 강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병원은 낮아진 수익을 보전하려고 검사를 확대하고, 환자는 방사선 노출과 비용 증가라는 이중의 위험을 떠안는다. 그러나 이를 감당해야 하는 영상의학 전문의 수는 제한돼 있어, 과중한 판독 업무와 의료의 질 저하가 불가피하다는 게 현장의 공통된 목소리다.
정승은 회장(은평성모병원 영상의학과 교수)은 "필요하지 않은 검사가 늘어나면서 장비는 24시간 가동되지만 전문의는 턱없이 부족해 판독 업무가 과중된다"며 "과잉검사와 과로가 맞물려 의료의 질이 떨어지고 있어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제 비교는 한국 영상의학의 현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의 CT 검사비는 수십만원에서 수십만원대 후반까지 책정돼 있는 반면, 한국은 여전히 10만원 안팎에 머물러 있다. 일본·독일·호주와 비교해도 절반 수준에 불과해, 영상검사 수가가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충욱 보험이사(경희대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CT 검사비는 8만~12만원 수준인데, 미국은 40만~50만원, 일본·독일·호주도 20만~30만원으로 최소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며 "우리나라 물가를 감안하면 지나치게 싸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수가 왜곡 문제는 노후 장비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국내 의료기관에 설치된 CT와 MRI 상당수는 10년 이상 된 장비로, 최신 장비와 동일한 수가를 적용받고 있다. 이 때문에 병원은 새 장비 도입보다 낡은 장비를 돌리는 쪽을 선택하게 되고, 환자는 선명도가 떨어지는 영상과 더 큰 방사선 노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정승은 회장은 "15년 된 CT나 최신 장비로 찍은 검사나 수가가 동일하다 보니, 병원은 새 장비 도입보다 낡은 장비를 돌리는 게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며 "연식만이 아니라 품질 관리, 운영 인력 교육까지 반영한 차등 수가제를 통해 환자 안전을 보장할 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인력난과 AI 불안…학회의 해법
영상의학과의 위기는 비수도권 인력난에서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수도권과 비교해 열악한 근무 여건과 낮은 보상은 전문의 이탈을 가속화시켰다. 특히 최근 의정 사태 이후 부산 지역 대학병원에서만 영상의학과 교수의 30~40%가 사직했고, 다수가 수도권으로 옮겼다는 보고가 나왔다. 지방 거점 대학병원에서는 특정 부위를 전담하는 교수가 단 한 명뿐인 사례도 드물지 않아, 환자 안전과 교육 공백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최준일 이사는 "대구·경북의 대표 대학병원에서 복부 영상은 교수 한 명이 전담하고, 흉부 전문의가 전무한 곳도 있다"며 "전공의 정원이 비수도권으로 확대됐지만 정작 지도할 교수들이 빠져 교육 공백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학회는 '지역완결형 영상센터'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장비를 무분별하게 설치하기보다 일정 규모와 질을 갖춘 센터를 마련해 의원급 의료기관이 환자를 의뢰하고, 검사 결과를 공유받는 구조다. 불필요한 자가검사와 과잉검사를 줄이는 동시에 환자가 상급병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아, 지역 의료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취지다.
정승은 회장은 "영상센터가 있으면 환자가 불필요하게 상급병원으로 가지 않고, 의원급에서 계속 치료를 이어갈 수 있어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의료AI는 영상의학의 또 다른 화두다. 전체 AI 의료기기의 70%가 영상의학 분야에서 나오고 있지만, 현 정책은 산업 육성에 치우쳐 안전성 검증은 뒷전이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비급여 위주 접근은 환자 부담을 높이고, 사전·사후 평가가 부재한 '시장 즉시진입 제도'는 환자 안전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최준일 이사는 "'시장 즉시진입 제도'로 대표되는 사전 평가와 사후 검증 체계의 부재는 환자 안전에 대한 우려를 키운다"며 "AI 오류가 발생했을 때 책임 주체에 대한 법적 기준도 불명확하다"고 말했다.
AI를 단순히 기술로만 보는 시각도 바뀌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는 AI를 의사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보완하는 도구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의료진 대상의 전문 사용자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목소리가 크다.
박성호 편집이사(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AI는 청진기처럼 교육을 받아야 쓸 수 있는 의료기기이므로, 연구자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모든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사용자 교육 체계가 필요하다"며 "전문가 교육이 잘 이뤄지면 좋은 AI와 도움이 되지 않는 AI를 걸러낼 수 있어 환자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회는 의료AI의 도입 목적을 산업 발전이 아닌 의료 질 향상에 둬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실제 사용자 경험을 반영한 수가 산정, 건강보험 체계 내 도입 방안 마련, 독립된 사후 검증기관 설립, 임시 허가 이후 안전 관리 강화, 책임보험 가입 의무화 등이 학회가 제안한 구체적 개선책이다.
정승은 회장은 "대한영상의학회는 의료AI 기술에 대한 가장 많은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안전한 AI 도입을 위한 정책 논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의지와 역량이 있다"며 "앞으로 정책 파트너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환자의 진단과 치료 전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영상의학은 정작 제도권에서 소외돼 왔다. 누적된 수가 인하와 인력난, 낡은 장비, 검증되지 않은 AI까지 쌓인 문제는 결국 환자 안전을 위협한다.
학회는 질환·상황 중심의 필수의료 재정의, 판독료와 촬영료의 분리, 응급·야간 판독 수가 인상, 지역완결형 영상센터 도입, 장비 품질 관리 강화, AI 사후 검증 체계 마련 등을 해법으로 내놓았다.
최준일 이사는 "영상의학이 무너진다면 필수의료 자체가 존재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며 "정부와 함께 환자 안전과 의료의 질을 지킬 수 있는 정책 파트너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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