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권이 달렸다"‥뇌전증학회, 신약·수술·중증 개선 촉구

'신약' 도입 더딘 현실…글로벌 승인 약도 국내선 미출시
'수술로봇'은 도입됐지만…전담팀·숙련도 갖춘 병원은 드물어
'반복발작'은 여전히 제도 밖…진단명 신설·중증 기준 확대 촉구

박으뜸 기자 (acepark@medipana.com)2025-06-21 05:58

대한뇌전증학회 구대림 총무이사, 서대원 이사장, 손영민 사회위원. 사진=박으뜸 기자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뇌전증 치료에도 이제 순풍이 불어야 한다." 의사들이 국내 뇌전증 치료 환경을 두고 던지는 말이다.

지금의 현실은 순풍과는 거리가 멀다. 사용할 수 있는 신약은 도입이 지연되거나 비급여로 남아 있고, 약물 치료가 듣지 않는 환자를 위한 수술 인프라는 여전히 부족하다. 중증도 기준도 미비해 환자들이 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치료 혜택은 곳곳에서 막히고 있다.

대한뇌전증학회는 20일 서울드래곤시티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내 뇌전증 치료의 3대 핵심 과제를 공개했다. 학회는 ▲신약 접근성 ▲수술 인프라 ▲중증 기준 정비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꼽으며, 이를 위한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 생존이 달린 '신약', "현장 목소리 반영 안돼, 코리아 패싱 우려"

뇌전증은 적절한 항경련제만으로도 발작을 조절할 수 있는 질환이다. 그러나 두 가지 이상의 약물로도 조절되지 않는 경우에는 '약물 난치성 뇌전증'으로 진단되며, 이는 단순한 만성질환을 넘어 중증 난치성 질환으로 취급된다.

이들 환자는 갑작스러운 사망(sudden unexpected death in epilepsy, SUDEP) 위험에 노출돼 있을 뿐 아니라 발작이 계속되면서 뇌손상, 인지 기능 저하, 심장 질환 등 심각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국내에서는 전체 뇌전증 환자의 약 30%가 약물 난치성 범주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신약이 실질적으로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SK바이오팜이 개발한 '세노바메이트'다. 2019년 미국 FDA 승인을 받았고, 2020년부터 해외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국내에선 도입이 늦어지고 있다. 최근에서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글로벌 혁신제품 신속심사(GIFT)' 품목으로 지정돼 겨우 신속심사 대상으로 포함됐다.

구대림 학회 총무이사(서울보라매병원 신경과)는 "뇌전증 환자에게 신약은 생존과 직결된 치료 수단이지만 약가 협상과 급여 심사 기준에서 의료 현장의 목소리는 거의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 시장을 기피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 실제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노바메이트 외에도 앞서 UCB파마의 '빔팻(라코사미드)'과 '브리비액트(브리바라세탐)'도 유사한 길을 걸었다. 빔팻은 제약사와 정부 간 약가 입장차로 인해 비급여로 남아 있다가 결국 2018년 시장에서 철수했고, 브리비액트는 국내 허가를 받았음에도 약가 협상이 결렬돼 출시되지 못했다.

서대원 이사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은 "혁신 약물을 제대로 쓰려면 우리 제도도 그에 맞게 갖춰져야 한다"며 "지금처럼 혁신의 가치를 무시하고 무조건 저가만을 고집하는 구조에서는 한국 시장에 신약이 들어올 이유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학회는 항발작약 신약의 조속한 도입을 위해 ▲패스트트랙(fast track) 제도 도입 ▲경제성 평가 방식의 전환 ▲정책적 유연성 확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뇌전증 수술, 인프라와 전문인력 미비"

약물 난치성 뇌전증 환자에게 수술은 돌연사를 줄이고 생존율을 높이는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수술을 받는 환자는 드물고, 수술까지 이어지는 시간도 상당히 지체된다는 것이 학회의 분석이다.

핵심 원인은 인프라와 인력의 부족이다. 수술에 필요한 장비와 병상, 전담팀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으며 뇌전증 수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낮아 수술이라는 치료 선택지 자체가 환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고 있다.

구 총무이사는 "뇌전증 수술에 대한 표준 가이드라인을 정립하고, 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캠페인이 병행돼야 한다. 수술을 시행할 수 있는 병원에 대한 인프라 지원과 환자 전원 체계 마련이 함께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뇌전증 수술로봇장비 지원사업'도 언급됐다. 복지부는 수술 역량을 갖춘 병원을 선정해 최대 7억 원(보조율 70%) 규모의 수술로봇 장비 도입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삼성서울병원, 해운대백병원, 고대구로병원, 이대목동병원이 수혜를 받았다. 올해도 추가로 1개 병원이 선정될 예정이다.

하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손영민 학회 사회위원(삼성서울병원 신경과)은 "현재까지 수술로봇 4대가 도입됐지만 삼성서울병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병원들의 수술 건수는 매우 저조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들 병원이 수술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점을 짚었다. 수술을 위한 전문팀 구성과 홍보, 교육체계가 부재한 상황에서 단순히 로봇만 들여놓았다고 수술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는 무리라는 것이다.

손 교수는 "뇌전증 수술은 로봇 장비만 있다고 가능한 치료가 아니다. 수술팀이 구성돼야 하고, 숙련도도 확보돼야 하는데 지금은 그 기반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학회는 향후 수술로봇 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장비 홍보 외에도 전문 교육 확대, 병원 간 연계 체계 구축 등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 '반복발작', 사각지대에 방치‥"진단명 신설로 제도화 필요"

학회는 마지막으로 '반복발작' 환자들이 산정특례 등 제도적 보호에서 배제돼 있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반복발작은 짧은 시간 내에 발작이 여러 차례 이어지는 질환으로 중대한 신체 손상과 생명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 제도에서는 중증 또는 희귀난치질환으로 분류되지 않아 각종 의료지원에서 소외되고 있다.

구 총무이사는 "반복 발작은 기존 뇌전증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별도의 중증 질환으로 봐야 한다. '발작질환'이라는 진단명을 신설해 희귀·중증난치질환 범주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와 함께 학회는 반복발작에 대해 ▲입원 치료 시 중증진료 기준 적용 ▲산정특례 대상 확대 등을 통해 제도적 보호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구 총무이사는 "반복발작이 기존 뇌전증 발작과 어떻게 다르고, 얼마나 위험한지를 의료진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도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며 인식 개선과 제도 정비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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