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K칼럼] 빈블라스틴, 두 번째 기회

[백승만 교수] 우리가 쓰는 약은 어디에서 왔을까

메디파나 기자2025-07-07 06:00

우리가 쓰는 약은 어디에서 왔을까 <2> - 빈블라스틴, 두 번째 기회

인슐린이 우리 삶을 바꿀 수 있었던 계기는 고집쟁이 의사 프레데릭 밴팅과 연구년으로 자리를 비운 존 매클로드, 그리고 동전 던지기에서 승리한 찰스 베스트의 행운이다. 

특히 갓 학부를 졸업한 베스트는 이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벨상급 연구를 이어나가며 신화를 써내려 갔다. 하지만 1/2의 확률로 동전의 선택을 받지 못한 노블은 그렇지 못했다. 연구 방향을 잘못 잡았고 이 와중에 지도교수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었다. 인생에서 노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운도 때로는 필요한 법이다.

그런 노블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노블은 이후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매클로드의 추천서를 받아 기초 연구를 이어갔지만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임상의사로 일했다. 환자를 진료하는 건 소중한 일이다. 동시에 바쁜 일이다. 이 바쁜 와중에도 노블은 당뇨병과 인슐린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는데 때마침 방문한 한 환자가 그에게 솔깃한 정보를 주었다. 

자메이카의 '일일초(Madagascar periwinkle, Vinca rosea) 추출물'이 당뇨병 치료에 효과가 좋다는 경험담이었다. 심지어 이 환자는 다음에 노블을 방문할 때 일일초 샘플도 가져다 주었다. 환자가 너무 열의가 넘치면 가끔 피곤한 법인데 노블은 이 환자의 경험담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관심을 넘어 연구까지 진행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러 있었다. 이때가 1952년인데 노블의 나이 53세 되던 해다. 취미라면 모를까, 새로운 연구를 하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다. 당뇨와 인슐린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연구와는 거리를 두었던 노블에게 떠오른 사람은 그의 동생인 로버트 노블이었다. 로버트 노블은 클라크 노블보다 열 살 어린 동생이며 캐나다의 다른 대학에서 천연물 추출 연구를 하고 있었다. 형 노블은 동생에게 이 샘플을 열어보지도 않고 가져다 주었다.

형에게서 당뇨병 치료 효과가 있는 좋은 식물을 건네받은 동생 로버트 노블의 반응은 논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실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일일초 추출물의 혈당 저하 효과는 비교적 미미했고, 그마저도 이미 다른 연구자들이 보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다며 가져오는 샘플에서 대박이 나는 경우도 있지만, 별 근거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도 동생 노블은 성실했다. 먹여서 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추출물을 적당히 정제해 주사로 투여한 것이다. 이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이 추출물을 주사 맞은 실험쥐들이 대부분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죽은 쥐들은 모두 백혈구 수치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당시로서는 백혈구 수치를 낮추는 물질이 거의 없었다. 낮추기만 한다면 백혈병 치료제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연구는 많이 했는데 정작 효과를 보이는 물질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벤젠 정도. 공업용 용매로 쓰는 발암물질 벤젠을 1920년대에는 백혈병 치료제로 연구하고 있었다. 

혹은 말라리아 원충을 감염시켜 백혈병 치료 효과를 보기도 했다. 참고로 말라리아 감염을 통해 매독을 치료한 학자는 노벨상도 받았다.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 치료법인데 안타깝게도 백혈병은 이렇게 해서 치료되는 병이 아니다. 엑스선을 조사시켜 암 조직을 태우기도 했고, 1940년대에는 화학무기인 질소 겨자를 사용해 백혈구 수치를 줄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연구같지만, 이 정도는 해줘야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는 질병이 백혈병이다.

그런데 일일초 샘플에게서 이런 효과를 본 것이다. 일일초는 '마다가스카르 페리윙클'이란 이름이 있지만 전 세계 각지에서 비교적 잘 자라는 식물이다. 이 식물의 특정 성분이 조혈세포에 작용해 백혈구 수치를 줄이는 것이 분명했다.

동생 노블은 일일초 샘플 중에서도 어떤 성분이 원하는 효과를 보이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2년여가 지난 1954년 약효를 보이는 주성분을 분리했다. 지금 봐도 독특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이 주성분에 붙은 이름은 '빈블라스틴'. 빈카 알칼로이드로서 항암제로 사용하는 천연물이 이렇게 개발되었다. 

빈블라스틴은 곧이어 분리된 빈크리스틴과 함께 백혈병 치료의 주요 선택지로 자리잡았다. 이 물질은 특히 소아 백혈병 치료에 효과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은 물질이기도 하다.

빈블라스틴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최고의 주역은 역시 동생 노블이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은 형, 클라크 노블이다. 

동전의 선택을 받지 못한 순간을 뒤로 하고 그는 이후로도 관련 연구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애착과 관심 덕분에 우리는 놓칠 뻔한 약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베스트의 삶도 대단하지만, 노블의 삶에도 경의를 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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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백승만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박사
- 전)美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 박사후연구원
- 현)경상국립대학교 약학대학장  
- '분자 조각가들', '대마약시대',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스테로이드 인류' 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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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시간 : 2025-07-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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