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연세대학교 서종희 교수, 의료사법제도개선위원회 김강현 위원, 대구지방법원 이종길 부장판사, 간사랑동우회 윤구현 대표. 사진=박으뜸 기자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한국 의료진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높은 사법리스크 속에서 진료하고 있다.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환자 측은 곧바로 형사고소부터 제기하는 경우가 많고, 매년 수백 명의 의사가 경찰 조사·검찰 송치·형사재판을 거치며 장기간 고통을 겪는다. 무죄율이 30~40%에 달해도 '입건'과 '재판' 과정에서 남는 상처는 개인 차원을 넘어 의료계 전체에 파급된다. 이는 젊은 의사들의 필수과 기피와 방어진료를 부추기며, 응급실·분만실·외과계 현장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문제를 풀기 위해 8일 국회에서 열린 '의료분쟁 관련 법·제도 개선방안 모색 공청회'에서는 해법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쟁점은 명확했다. ▲형사처벌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중과실'과 '필수의료'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보험·공제 요건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 공통된 방향은 민사 중심 보상체계 강화, 무과실 보상제도의 도입, 그리고 조건부 형사특례였다.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서종희 교수는 우리나라 의료진이 해외보다 훨씬 높은 사법리스크에 노출돼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의료사고에 대한 사법리스크가 매우 크며, 형사적 위험뿐 아니라 민사에서도 예외 법리를 넓게 인정해 의료진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아닌 경과실에 대해서는 형사책임을 면제하고, 민사책임을 통해 환자 피해를 신속히 보상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며 "특히 필수의료 영역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무과실 보상제도를 마련해 피해를 빠르게 구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배상공제조합 의료사법제도개선위원회 김강현 위원은 의료의 본질적 불확실성을 제도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질병의 다양성과 환자 개별 특성, 진료 상황의 차이는 완치를 어렵게 만들고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의사는 언제나 선의로 진료하지만 의료사고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집단 사망 사건을 사례로 들었다. 비록 무죄 판결로 끝났지만 구속 수사와 언론 보도로 인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이 급감했고, 필수과 전반의 기반까지 흔들렸다는 것이다. 김 위원은 "결국 이런 사건이 응급실 '뺑뺑이' 같은 현실을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해외 사례도 눈길을 끌었다. 2004년 일본 후쿠시마현 산모 사망 사건에서도 담당 의사가 구속됐지만 1심 법원은 "의료행위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일본은 무과실 보상제도와 의료사고조사제도를 도입해 재발 방지와 환자 안전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김 위원은 "한국도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있을 때만 형사책임을 묻고, 조사제도를 마련해 사후 처벌이 아닌 재발 방지 중심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지방법원 이종길 부장판사는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는 조정이나 중재보다 법원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짚었다. 환자 측이 과실 입증의 어려움 때문에 형사고소부터 제기하는 경향이 강해, 의사들은 민사보다 형사 문제에서 더 큰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 부장판사는 "매년 수백 명의 의사가 경찰 조사, 검찰 조사, 형사재판을 거치며 장기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필수과 기피와 방어진료, 과잉진료로 이어져 종종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살리지 못하는 현실을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의료사고 분쟁 해결의 기본 방향으로 ▲환자의 신속한 피해 회복을 위한 민사책임 강화 ▲형사고소 남용을 막기 위해 일정한 경우 형사책임 면제 ▲이를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 등을 제시했다.
또한 이 부장판사는 "자동차 사고 관련 교통사고처리특례법처럼 고의나 중과실이 아닌 의료사고에는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 특례법 제정을 고려해야 한다"며 "의료배상책임보험가입을 의무화하고, 중대한 의료과실의 기준을 의료 과목별로 명확히 설정할 기구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간사랑동우회 윤구현 대표는 의료분쟁 제도 논의가 30~40년 이어졌지만 여전히 당사자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처럼 피해의 신속한 회복과 가해자 부담의 예측 가능성을 보장하는 장치가 의료에도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 것이다.
윤 대표는 "의료계는 과도한 민·형사 부담을 말하고, 환자단체는 입증 곤란·지연·저액 배상을 호소한다. 이제는 '조건이 갖춰진' 안전망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형사특례 논의에서 중과실의 정의, 필수의료 범위, 보험·공제 요건을 구체화하지 못한 점을 비판했다.
보험·공제의 저가입·저보장 문제도 언급됐다. 의료기관 3분의 1가량이 배상책임보험이나 공제에 가입하지 않았고, 가입자도 보상한도를 충분히 채우지 않는 현실이다.
그는 "정말 분쟁이 걱정이라면 보험을 충분히 든다. 그러나 의료배상 공제의 보상한도, 무엇보다 형사합의 특약은 현장 필요에 못 미친다. 한도를 올리고 신속 지급을 보장해야 특례가 작동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예고한 '의료사고처리특례법(안)'에 대해서는 위헌 가능성을 경계했다. 윤 대표는 "필수의료 범위를 넓히면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사례를 볼 때 위헌 가능성이 올라간다"며 "특례 조건과 필수의료 범위에 대해 의료계가 구체적인 의견을 내야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법의 무게중심은 형사 대신 민사로 옮겨야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는 "민사 배상을 충분히 하고 조정으로 빨리 끝내게 만들면 형사 고소의 유인이 줄어든다. 근로복지공단이나 자동차보험처럼 피해자-전담기관 구조를 만들고, 중대한 과실일 때만 의료진에 구상권을 행사하는 모델을 검토할 만하다"고 말했다.
무과실보상제도와 관련해서도 한도 상향과 지급 속도 개선을 주문했다.
윤 대표는 "무과실보상제도가 소송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 만큼 보상한도를 높이고 지급을 앞당기는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40년간 의료계는 특례를 주장해왔지만 구체적인 조건은 제시하지 못했다. 어떤 경우 형사처벌을 하고, 하지 않을지 등 민사소송 대신 합의나 조정으로 유도할 방법까지 포함해 구체적인 의견을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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