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은 오랜 시간 그 길을 닦아왔다. 정치적 소음보다는 방향을, 단기 성과보다 축적된 실행력을 고민하며 의료정책의 좌표를 설계해 온 연구기관이다.
2002년 설립 이후 의료계 대표 싱크탱크로 자리 잡은 이 연구원은 최근 '중형 정책연구기관'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데이터 기반 연구, 현장 밀착형 조사, 국제 학술 활동을 기반으로 실행 가능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고, 이를 의료계와 사회 전반에 제안하는 방식으로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다.
2일 의협 출입기자단과 만난 문석균 부원장은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고 양광모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의정연은 단기간 성과를 내기 위해 서두르는 조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묵묵히 할 일을 하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어느 순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의정연은 '국민과 회원을 위한 보건의료복지 정책을 연구하고 선도한다'를 미션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비전으로 ▲사회적 책임(Responsibility) ▲혁신(Innovation) ▲건강증진 기여(Healthcare) ▲전문성 강화(Professionalism)이라는 4대 키워드를 설정했다.
이 키워드는 의정연의 영문 약칭(RIHP)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단순 상징을 넘어, 구성원 전원이 참여해 만들어낸 조직 철학이라는 점에서 내부 공감대도 강한 편이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 기반도 정비됐다. 의협이 운영하는 연구윤리심의 절차(IRB)를 통해 모든 연구는 정기적인 사전 심사를 받고 있으며, 자체 통계 소프트웨어와 설문조사 시스템을 도입해 독립된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 가능해졌다. 내부 디지털 아카이브도 구축돼 모든 연구자료가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책임·혁신·소통·전문성' 기반 재편 '말하는 조직'에서 '제안하는 조직'으로
최근 의정연은 보고서 작성에 그치지 않고, 실제 정책 실행을 염두에 둔 논의 구조를 만들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전문위원단 개편과 정책포럼 정례화다.
기존 자문·객원 체계를 통합해 건강보험, 법의학, 보건정치 등 주제별 전문위원단을 구성하고 있으며, 매달 의료정책 포럼을 개최해 현안에 대한 논의와 제언을 공개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국제 논문 게재 성과도 이어지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대한 분석 보고서는 SCI 저널 BMC Public Health에 게재됐고,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분석은 Scopus 등재 국제학회지에 실렸다. 최근에는 전공의 사직서를 중심으로 한국의 업무개시명령제도를 분석한 논문이 독일 의료법 저널에 독일어로 실리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문 부원장은 "의협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되는 일이 없도록, SCI·Scopus 논문 게재를 병행해 국제적 설득력을 확보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연구 인력도 확대된다. 현재 12명 규모의 내부 인력을 중심으로 각자의 전문 분야를 특화하고 있으며, 올해 안에 2~4명을 신규 채용할 계획이다. 빅데이터, 보건행정, 의료통계 등 분야의 전공자를 우선 채용하고 멘토링·매칭 체계도 마련한다.
교육 기능도 강화된다. 시도의사회 임원을 대상으로 한 리더십 아카데미가 준비 중이며, 전국 의사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한 교육 콘텐츠도 병행 개발 중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유관 연구기관과의 교류도 실무적으로 이어갈 방침이다.
향후에는 의사인력 정책, 건강보험 제도 개편, 의료기관 기능 재정립, 의료인의 기본권 보장 등 굵직한 정책 어젠다를 중장기 연구 과제로 이어갈 계획이다.
의정연은 빠른 결론이나 감정적 대응보다는, 자료와 분석을 기반으로 정책의 방향을 설계하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변화다.
문석균 부원장은 "정책은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묵묵히 그 기반을 닦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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