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비만학회 이준혁 대외협력정책위원회 간사, 남가은 보험법제이사, 박정환 대외협력정책이사. 사진=박으뜸 기자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대한비만학회가 비만치료제 급여화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학회는 그동안 '비만은 질병'이라는 인식 확산에 힘써왔지만, 이제는 예방 중심 정책의 한계를 넘어 국가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상 체중자에게까지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고가 약물, 미용 목적으로 오인되는 현실, 저소득층 환자의 치료 포기와 건강불평등 심화 문제를 바로잡으려면 건강보험 체계 안에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비만 정책은 오랫동안 예방 위주로 설계돼 왔다. 정부는 국가비만관리 종합대책을 내놓고 다양한 사업을 이어왔지만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여전히 상당수 환자가 방치되고 있으며, 사회 전반에는 비만을 개인 책임으로만 치부하는 시각이 남아 있다.
4일 대한비만학회 '지속 가능한 비만 관리체계 구축을 위한 건강보험정책 심포지엄'에서 이준혁 대외협력정책위원회 간사는 이러한 현실을 언급하며 "비만은 사회적 문제이며 국가차원에서 해결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합의가 돼 있다. 다만 비만은 예방 관리가 필요한 위험요인 중 하나인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 정책이 예방에 치우쳐 있다고 꼬집으며 "우리나라에서 비만을 예방하고자 하는 역사는 길지만, 여러 사업이 이어졌음에도 예방관리는 성과가 크지 않았다. 그나마 의미 있는 변화는 2019년 비만대사수술에 건강보험이 적용된 것이었지만, 정책 추진 인력과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비만 전문가와 함께 정책을 짰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만치료제는 임상적으로 효과가 입증됐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환자가 치료를 중도에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용'이다. 경제적 부담은 특히 저소득층 환자에게 더 크게 작용해 형평성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이준혁 간사는 "높은 성공률에도 불구하고 비만 약물치료를 중단하는 이유는 약 30%가 비용 부담 때문이다. 치료제가 비급여권에 있으면 저소득층에서 형평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비만학회 남가은 보험법제이사도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 그는 "비급여로 인해 환자 부담이 늘어나고, 치료 우선순위 환자일수록 저소득층이 많아 건강불평등이 악화된다. 높은 탈락률과 장기적 관리 부재, 안전성·적정성 관리 미흡은 결국 오남용 위험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정책적 공백은 국가가 비만을 질병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인식을 강화시켜, 관리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보험재정 쟁점과 단계적 급여화
비만치료제 급여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보험재정이다. 항암제조차 급여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비만약에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반론이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회는 단계적 급여화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적용 기준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준혁 간사는 "2025년 현재 비만은 질병이라는 개념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BMI 기준의 비만도를 넘어 다각도로 평가해야 한다. 비만은 가장 시급히 다뤄야 할 건강지표로, 생애주기에 따른 취약계층 차이와 동반질환에 따른 부담까지 고려해야 한다"며 "비만 약물의 비용 효율성 평가 및 BMI 한계를 넘어 치료 우선순위와 보장 범위를 확대할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대한비만학회 박정환 대외협력정책이사는 적용 대상을 구체화했다. 그는 소득분위와 BMI 35 이상 고도비만 환자를 1순위로 하고, 최근 유병률이 급격히 늘고 있는 소아청소년에게도 먼저 적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남가은 이사 역시 "재정 건전성을 고려한 단계적 급여화 모델이 필요하다. 초기 적용 대상은 고도비만, 합병증 동반자, 비만대사수술 환자, 소아청소년 고위험군이 될 수 있다. 정확한 환자군 설정은 법적 근거와 연구 결과가 뒷받침돼야 하며 근거 기반 비용효과성 평가와 지속적 연구가 필수적이다"고 부연했다.
보험재정의 한계를 보완할 대안으로는 식품 과세 등 건강 관련 재정정책이 거론됐다. 박정환 이사는 "설탕·소금·지방세, 가당음료 과세, 건강보조금 지원 등이 논의되고 있다. 물론 국민 부담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가격이 오르면 소비가 감소하고 기업은 제품을 재설계하게 된다. 이는 더 건강한 식음료 생산으로 이어지고, 동시에 치료·예방 재원 마련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비만을 질환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국가가 치료 지원에 나서고 있다. 미국에서는 '위고비', '젭바운드(마운자로)', '삭센다'가 처방되고 있으며, 메디케어는 심혈관질환 이력이 있는 환자에게 위고비를, 수면무호흡 환자에게 젭바운드를 보험 적용했다. 트럼프 정부는 메디케어·메디케이드의 비만치료제 보장 범위를 시험하는 5년 검토 프로그램을 발표하기도 했다. 영국은 위고비를 제한적으로 보장하면서 마운자로 확대 기준을 마련했고, 일본은 GLP-1 유사체를 보험에 포함시키되 2024년 2월부터 처방 기준을 강화했다.
반면 한국은 비만대사수술 외에는 보험 적용이 이뤄지지 않는다. 남가은 이사는 "우리나라는 비만대사수술 외 건강보험 적용이 없다. 이는 비만을 개인 문제, 미용 차원으로 취급하는 경향의 반증"이라며 "비만은 조기 진단과 적극적 치료가 필요한 만성질환이므로 국내 실정에 맞는 범주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정환 이사도 법적 기반 마련을 촉구하며 '비만법 제정'에 힘을 실었다. 현재 국회에는 '비만질환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안'이 계류 중이다.
박 이사는 "이미 비만이 다양한 법에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필요성을 부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암, 치매 등 주요 사망 원인은 대부분 비만에서 비롯된다. 세계적 추세는 비만을 중심으로 만성질환을 관리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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