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경기도 소재 한 대학병원에서 2018년 발생한 분만 의료사고가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자연분만 과정에서 신생아가 뇌성마비를 입었고, 사건은 6년 넘게 이어진 소송 끝에 지난 5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은 신생아 부모가 청구한 24억여원 중 30%에 해당하는 6억5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인정했다. 판결문은 태아심박동 감시에 대한 주의의무 해태 등 경미한 과실을 인정하면서도, 결과가 중대하다는 이유로 제한적 책임을 부과했다.
이후 부모는 민사소송에 이어 형사고소까지 제기했고, 검찰은 의료진을 불구속 기소했다. 사건은 민사와 형사 법정으로 동시에 넘어갔다. 이번 판결을 두고 의료계는 "필수의료를 위축시키는 사법리스크"를, 환자단체는 "설명과 충분한 배상도 없는 피해자 방치"를 말하며 정반대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의료계: "사법리스크로 필수의료 붕괴"
의료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대한모체태아의학회, 대한의학회, 대한의사협회, 직선제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 성남시의사회, 젊은 산과의사들까지 연이어 성명을 내며 "불가항력적 사고까지 형사처벌로 몰아가는 것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직선제 산부인과개원의사회는 "법원이 과실을 경미하다고 판단했음에도 거액의 배상을 명령한 것은 의료계에 불안을 조성하는 결정"이라며, 민사 배상·형사 처벌·면허 취소까지 겹치는 '3중 징벌' 구조를 지적했다. 대한의학회 역시 "교수진을 잠재적 범죄자로 내모는 것은 산과학 교육과 고위험 산모 진료 인력의 멸종으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의료계의 시각은 일관된다. 분만·응급처럼 본질적으로 위험을 내포한 진료에서 언제든 예기치 못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이를 형사 문제로까지 끌고 가면 의사들이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2의 이대목동병원 사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중환자실 사건은 최종 무죄로 결론 났지만, 그 과정에서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율은 급락했고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 의료계는 같은 악순환이 산부인과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의료계는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 ▲불가항력 의료사고에 대한 국가책임제 도입 ▲무과실 분만사고 보상금 상향(현행 3000만원 → 10억원) ▲분만 관련 민형사상 의료과실 가이드라인 마련 등을 요구하며 사법 리스크 완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환자단체: "형사고소는 피해자에겐 마지막 수단"
반면 환자단체연합회는 "형사고소를 택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지 않는 한, 의료사고 형사고소는 줄지 않는다"고 짚었다. 환자 가족이 분노와 상실 속에서 민사와 형사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설명, 사과, 예방 약속, 신속한 배상만 있었더라면 상당수 피해자는 형사고소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환자단체의 입장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피해자가 마주한 병원은 사과하지 않았고, 책임을 회피했으며, 피해 구제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이번 사건에서 피해 아기의 어머니가 같은 병원의 마취통증의학과 전임의였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피해자가 되기 전까지는 형사고소와 거액 배상에 반대했을지도 모를 동료 의사가, 결국 형사소송까지 선택했다는 점은 환자단체가 말하는 '울분과 불신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 안상호 대표는 "의사를 지키려면 환자를 먼저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민사 배상액이 거액이라는 의료계 주장과 달리, 피해자가 되면 그것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게 된다"며 "의료사고 발생 시 충분한 설명과 사과, 합리적인 배상을 통해 환자의 신뢰를 얻는 것이 필수과 보호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환자단체가 내놓은 해법은 구체적이다. 고위험 필수의료 종사자가 소명감을 갖고 진료할 수 있으려면 국가가 재정을 투입해 근무 여건을 개선하고, 의료사고 발생 시 법무 지원을 강화하며, 책임보험료나 손해배상금을 공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과실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제의 한도를 확대하고, 경미한 과실의 경우 국가가 일정 부분을 부담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아울러 의료계·법조계·환자단체·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체 구성, 의료사고 설명의무 강화, 사과·유감 표시의 증거능력 배제, 피해자 트라우마센터 설치와 감정제도 개혁까지 폭넓은 개선책을 요구했다.
법조계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전문가들은 의료사고 분쟁 해결의 기본 방향으로 ▲환자의 신속한 피해 회복을 위한 민사책임 강화 ▲형사고소 남용 방지를 위한 일정한 경우 형사책임 면제 ▲이를 뒷받침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제시했다.
지난 5월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와 대한소아심장학회가 낸 공동 성명은 이례적인 제안으로 주목받았다. 양측은 (가칭)의료사고심의위원회 설치를 제안하며, 중대한 과실이 아닌 경우 수사당국이 공소 제기를 자제하도록 권고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학회는 환자 피해 발생 시 충분한 설명과 합리적 배상 절차 참여를, 환우회는 형사고소보다 조정 절차 협조를 약속했다.
'과도한 분쟁으로 필수의료가 위축되는 악순환을 막아야 한다'는 메시지는 환자 보호와 필수의료 존속이 결코 양립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분만 사고 판결을 두고 의료계는 "사법리스크"를, 환자단체는 "피해자 방치"를 말하지만 결국 뿌리는 같다. 언어는 달라도 그 중심에는 신뢰의 부재가 자리하고 있다. 제도가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의사는 법정에서, 환자는 병원 앞에서 계속 싸울 수밖에 없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도 "같은 병원 동료 의사였던 피해자조차 합의하지 못하고 형사까지 진행했다는 점은 의료계와 환자 모두가 성찰해야 할 지점"이라며 "이제는 대립이 아니라 현실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독자의견
작성자 비밀번호
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