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전공은 인기지만, 수술실은 공백…'마취과'의 딜레마

충원율 90% 넘는 인기과…통증클리닉 개원으로 수술실은 비어
저수가·사법 리스크에 전신마취 기피…"분만병원 중단 속출"
무통분만·제왕절개도 위태…산모 사망 사건까지 현실화

박으뜸 기자 (acepark@medipana.com)2025-09-23 11:59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겉으로 보기엔 인기과다. 의정갈등 이후 전공의 모집이 전반적으로 위축된 상황에서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5년도 하반기 전공의 모집 결과'에 따르면 마취통증의학과 전공의 충원율은 90.7%에 달했다. 이는 피부과(89.9%), 안과(91.9%), 성형외과(89.4%) 등 이른바 '피·안·성·정·재·영'이라 불리는 인기과목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의정갈등 전에는 매년 200명 안팎의 신규 전문의가 배출됐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정작 전신마취를 맡을 사람이 없다"는 호소가 이어진다.

문제는 전문의 수 자체가 아니라, 상당수 전문의들이 통증클리닉으로 빠져나가 수술실에서 마취를 담당하는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요양기관 개·폐업 현황'에 의하면 마취통증의학과 의원은 2023년 75개에서 2024년 96개로 28% 증가했다. 대부분이 주사·시술 위주의 통증클리닉으로, 개원 쏠림 현상이 뚜렷하다.

전공의 충원율이 높더라도 수련을 마친 이후 전문의들이 수술실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은 더 큰 문제다. 통증클리닉은 수요와 수가가 안정적인 반면,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 이뤄지는 고위험 수술 마취와 중환자 관리, 당직 근무는 부담이 크다. 이 때문에 상당수가 통증클리닉 취업이나 개원을 택하면서 상급종합병원조차 마취전문의 고용난을 겪고 있다.

마취과 전문의가 수술실보다 통증 진료를 선호하는 배경에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전신마취는 낮은 수익성과 주말·야간 당직, 고위험 환자 마취 중 발생할 수 있는 의료사고 소송 리스크가 뒤따른다. 이에 비해 통증클리닉은 실손보험 청구 환자 비중이 높고, 주사 시술만으로도 안정적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이석수 간사는 "대학병원 교수들조차 통증클리닉으로 개업하는 추세"라며 "수가 체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마취하는 의사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들의 업무는 단순히 '마취'에 그치지 않는다. 수술 전 환자의 기저질환 평가, 수술팀 협의, 동의서 작성부터 수술 중 전신마취 관리, 수술 후 회복실·중환자실 케어까지 전 과정에 투입된다. 그만큼 고강도의 노동과 법적 부담이 뒤따른다. 의료계는 전문의 초빙료 인상, 병·의원급 마취 수가 가산, 응급·고위험 수술에 대한 별도 보상 같은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마취과 의사들이 수술실로 돌아오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하듯 마취과 의사들의 수술실 이탈은 멈추지 않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통증 진료는 수익성이 높고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보니, 위험 부담이 큰 전신마취를 굳이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특히 분만 과정에서 무통분만과 제왕절개 등 마취과 전문의의 역할이 필수적인 분만병원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 고령 산모와 고위험 산모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산부인과 의사가 단독으로 모든 위험을 감당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기에 분만병원은 24시간 언제든 응급 수술이 잡히는 특성상 근무여건이 가장 열악하고, 무과실 의료사고에도 소송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아 마취과 전문의들이 더욱 기피하고 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김재연 회장은 "마취과 의사를 구하지 못해 분만병원을 중단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며 "응급분만은 물론 야간분만조차 불가능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실제 광역시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는 무통마취 중 산모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마취과 전문의가 없어 산부인과 의사가 직접 마취를 담당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석수 간사는 "산부인과 의사가 하고 싶어서 마취를 한 게 아니라, 마취과 의사가 없어서 떠맡은 것"이라며 "광역시에서도 이 정도 상황이면 군 단위 지역은 사실상 붕괴 상태라고 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밤에 마취과 의사를 초빙하려면 부르는 게 값이고, 수술비 전액을 다 드려야 할 정도"라며 "그럼에도 오게 하기 어렵다. 산부인과가 유지되려면 마취수가 지원과 현실적 조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소아마취 분야 역시 기피 현상이 심각하다. 성인에 비해 체구가 작고 장기 기능이 미성숙해 산소 부족이나 약물 농도 변화 같은 작은 흔들림에도 위중한 상황으로 이어지기 쉽다. 여기에 사용할 수 있는 약제도 제한적이어서 난이도가 높다. 저출산으로 환자 수가 줄면서 수련 기회조차 부족하고, 아이를 걱정하는 부모를 상대해야 하는 부담까지 겹쳐 전문의들이 꺼리는 분야가 되고 있다. 병원 역시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인력과 자원 배분을 꺼리면서, 결과적으로 소아 환자 안전까지 위협받고 있다.

현장에서는 "정부가 1년 넘게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 이와 같은 참사가 현실화됐다"는 냉소가 퍼지고 있다.

마취통증의학과는 인기과다. 그러나 정작 마취를 하지 않는 의사들이 늘어나면서, 수술실과 분만실, 소아진료 현장까지 공백에 내몰리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필수의료를 살리려면 가장 먼저 '마취할 의사'가 돌아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현장의 절규가 더는 외면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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