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가 희귀질환 치료제‥환자 권리와 재정 "사회적 합의 절실"

불확실성 큰 신약, CED와 RWD 기반 성과평가로 대응
환자단체 '국가 컨트롤타워 마련·별도 기금 조성' 촉구
윤리학계 "분배 정의와 절차적 정당성 확보가 필수"

박으뜸 기자 (acepark@medipana.com)2025-09-26 05:56

심평원 이소영 실장,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권영대 정책위원, 연세대학교 이일학 교수. 사진=박으뜸 기자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희귀질환은 진단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치료제 개발도 더디다. 어렵게 신약이 나오더라도 고가 약가라는 벽 앞에서 환자는 접근하지 못하고, 정부는 재정 배분의 한계에 부딪힌다. 환자와 정부, 임상현장 모두가 치료와 비용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고 있는 것이다.

25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개최한 '희귀·중증 질환 치료방향과 사회윤리' 심포지엄에서는 환자 접근성과 건강보험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해법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희귀·중증질환 치료제는 미충족 의료수요를 이유로 신속 허가가 이뤄지지만, 대부분 소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제한적 임상시험에 기반하기 때문에 근거가 충분치 않다. 경제성 평가가 생략되는 경우도 많아 불확실성이 제도에 그대로 전가된다. 그럼에도 시장에 진입한 치료제는 환자 접근성을 넓히는 동시에 고비용이라는 부담을 안긴다.

환자 1인당 연간 4300만원 이상 드는 고비용 약제는 국내에서 2023년 44개에서 2024년 52개로 늘었고, 해당 약제 비용만 8800억원에 달했다. 이 때문에 고가 약제 급여가 다른 신약의 등재 기회를 줄일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심평원 약제성과평가실 이소영 실장은 듀센 근이영양증 치료제 '엘레디비스(Elevidys)' 사례를 들어 환자 안전 문제를 경고했다. 신속 허가 당시 근거 부족과 위약군 대비 유효성 입증 실패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진입했으나, 이후 환자 사망 사례가 나오면서 임상시험과 자발적 공급이 중단된 것이다.

그는 "식약처가 허가했다고 해서 심평원이 급여를 바로 결정할 수 없는 이유"라며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사례는 환자와 일부 단체가 빠른 허가와 심사를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 성급한 결정이 오히려 안전성 문제를 키울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대안으로 꼽힌 '근거생산 조건부 급여(CED)'는 불확실성이 큰 치료제라도 사후 근거 생산을 조건으로 급여를 허용하는 제도다. 우리나라는 이미 2차 국민건강보험종합계획(2024~2028)에 따라 제도 확대를 추진하고 있으며, 올해 3월 고시 개정을 통해 약제급여평가위원회도 CED 제안을 직접 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시기 'RWE 생성 가이드라인' 위탁연구(3~11월)와 약제·질환별 레지스트리 구축, 반응평가 CRF, 청구심사자료 관리·분석시스템 등 성과평가 인프라 강화도 병행되고 있다. 미국·영국·프랑스·캐나다 등 주요국 역시 RWD를 활용한 성과평가와 사후관리를 확산시키고 있다.

희귀·중증질환 치료제의 재정 문제를 두고는 별도 기금 조성 필요성이 공통된 의견으로 모아졌다. 환자단체·의사협회·제약업계 등 여러 이해관계자도 기금 마련에 대체로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소영 실장은 "불확실성이 큰 희귀질환 치료제라도 사후 평가를 조건으로 급여해 환자 사용을 보장해야 하지만, 건강보험 재정만으로는 지속가능성이 흔들릴 수 있다"며 "별도 기금 운영 같은 방안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자단체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권영대 정책위원은 "지속가능한 재정 운영을 위해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공정하고 투명한 기준이 필요하다"며 "별도 기금 조성이나 안정적 재정 투입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환자단체는 국가 책임의 부재도 지적했다. 세계적으로 8000여 개 희귀질환이 보고됐고, 국내에서 관리되는 질환만도 1314개에 달한다. 의료기술 발전은 새로운 치료법을 만들지만 동시에 새로운 질환을 발견하게 해 환자 수가 줄어들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여전히 정확한 유병 통계조차 갖추지 못했고, 전담 부처도 부재하다. 해외 주요국이 전담 기관 설립과 환자단체 참여를 통해 국가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권 위원은 "OECD 국가들은 환자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정책적 지원 원칙을 견지하며 치료제 개발과 삶의 질 개선을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희귀질환자의 정확한 유병 인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보건복지부 내 희귀질환정책국 설치와 국립희귀질환센터 설립을 통해 국가 차원의 체계적 관리 시스템을 마련하고, 환자단체와 전문가 의견을 정책 결정 과정에 의무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리적 논점도 빠지지 않았다. 희귀질환 치료제는 기존 치료법이 없는 상황에서 환자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지만, 동시에 초고가 비용과 제한된 효과로 인해 건강보험 적용 여부를 둘러싼 갈등을 낳는다. 건강보험은 본질적으로 한정된 자원 위에서 운영되기에, 소수 환자를 위한 지출을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희귀질환 치료제는 단순히 비용 문제를 넘어 사회적 합의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특히 전통적인 비용-효과성 분석(ICER) 기준으로는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윤리학계에서는 '절차적 정의'를 대안적 접근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틀이 'A4R(Accountability for Reasonableness, 합리성에 대한 설명책임)'이다. A4R은 분배의 원칙적 합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함으로써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려는 방식이다. ▲의사결정 과정의 공개성(publicity) ▲합리적 근거의 관련성(relevance) ▲결정에 대한 이의제기 가능성(revision/appeals) ▲과정을 지킬 수 있는 집행 보장(enforcement)이 그것이다. 이는 특정 정책 대안을 곧바로 제시하기보다는, 고가 치료제에 대한 제한과 분배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 자체에 신뢰와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법론으로 평가된다.

연세대학교 의료법윤리학과 이일학 교수는 "희귀질환 치료제는 새로운 의학적 가능성을 열었지만 극히 높은 비용과 제한된 효과, 대체 치료 부재 때문에 건강보험 포함 여부를 두고 윤리적 논쟁이 깊다"며 "핵심 쟁점은 누구에게 얼마만큼 자원을 할당하고 그 한계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정당화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합리성에 대한 설명책임(Accountability for Reasonableness)을 충족하는 절차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이는 특정 대안이라기보다 초고가 치료제 의사결정 과정에 신뢰와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법론적 틀"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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