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소아청소년과 대란'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긴 추석 연휴 동안 아이가 갑자기 아파 강원 주문진에서 응급의료포털 '이젠(E-gen)'을 통해 소아진료가 가능한 병원을 검색했다. 결과는 단 한 곳뿐이었다. 오전 10시 30분 도착했을 때 이미 접수가 마감돼 있었고, 오후 1시부터 선착순 접수를 받아 2시 30분부터 진료를 시작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결국 5시간을 기다려 겨우 아이를 진료받을 수 있었다.
동해에서 왔다는 한 부모는 "연휴 동안 문을 연 곳을 찾아다녔지만 소아를 보는 곳은 이곳 하나뿐이라 오전부터 마냥 기다렸다"고 말했다.
진료실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아이를 안은 부모들이 대기실을 가득 메웠고, 의료진은 쉴 틈 없이 환자를 맞았다. 진료가 지연되자 화를 내는 보호자도 있었지만, 화장실조차 갈 틈이 없는 의사에게 여유란 없었다.
이처럼 명절마다 되풀이되는 '소청과 대란'은 더 이상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지방 의료현장에서는 이미 일상화된 풍경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소아청소년 의료체계 개선 방안 연구'에 따르면, 2024년 2분기 기준 전국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총 6490명으로, 서울(1510명)과 경기(1691명)에만 전체의 49.4%가 집중돼 있다. 반면 세종(78명), 제주(71명), 전남(149명) 등은 전문의 수가 극히 적었다.
이 수치는 단순한 분포를 넘어, 수도권과 지방 간 의료 접근성의 격차가 이미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소아청소년(18세 이하) 인구 1000명당 소청과 전문의 수는 2023년 말 기준 0.84명으로, 같은 시점 전체 인구 1000명당 전문의 2.2명에 비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2022년 기준으로는 서울(1.15명), 부산(1.01명), 광주(0.97명) 등 대도시가 평균(0.80명)을 웃돌았으나, 충남(0.56명), 전남(0.59명), 충북(0.62명), 제주(0.65명) 등은 평균에도 못 미쳤다. 서울과 충남의 격차는 두 배 가까웠다.
전문의의 수는 곧 지역의 생명선이다. 소청과 전문의가 한 명이라도 떠나면 진료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다.
강원도 속초의료원 앞에 내걸린 '소청과 전문의 진료 개시' 현수막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얼핏 단순한 홍보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역 공공병원이 전문의 한 명을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의 결과물이다.
한 지방 의료원 관계자는 "전문의 한 명이 오면 병원이 돌아가고, 한 명이 떠나면 진료가 중단된다"며 "현장의 구조 자체가 붕괴 직전"이라고 전했다.
보건사회연구원도 이번 보고서에서 소아청소년과의 인력 불균형을 필수의료 붕괴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했다. 특히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가 구조적으로 고착화되면서, 인력 공급의 불균형이 지역 의료체계 전반을 흔드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소아청소년 전공의가 감소하고 있어 이 점이 필수의료서비스 공급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며 "소아청소년 의료자원의 분포가 수도권에 집중돼 지역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공의 감소에 따른 부담은 기존 인력에게 전가되고, 재입원율 등 진료 질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함께 보고서는 "의료기관 분포와 전문의 등 의료인력 불균형 해소가 시급하며,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의 균형 수급을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정부가 단기 지원에 그칠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구조적 보상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도 명시됐다.
보고서는 "지속 가능한 전문의 확보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 대책을 확대하고, 소아진료의 공백을 완화하기 위해 지역 수가와 야간진료 수가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다만 정책적 대안은 이미 제시됐지만 실행은 더디다. 현장은 여전히 인력난과 과부하에 시달리고 있다. 지방은 소아 전문의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정부 대책이 발표되기도 전에 현장이 무너지는 구조다. 단기 수가 인상이나 시범사업으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대한소아청소년병원협회 최용재 회장은 이런 현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체감하는 인물이다. 그는 "소아 질환은 유행성과 대량 발생이 흔하고, 연령별로 진단과 치료가 달라 전용 인력과 시설이 필요하다"며 "1·2차 진료의 역량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전체가 버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야간·휴일 진료는 전문의의 부담이 크다. 인센티브 없는 '희생 모델'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지금은 단순한 논의가 아니라 정책의 골든타임이다. 제도를 늦추면 다음 피해자는 또 다른 아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정부의 대응 속도가 여전히 현장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의료계는 실질적 지원이 뒤따르지 않는 한, 인력난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소청과 개원의는 "정책보다 현실이 더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며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유지되지 않는 구조"라고 토로했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역시 같은 우려를 드러냈다. 의사회는 "소청과는 필수의료의 최전선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다"며 "수많은 정책이 시범사업에 그치며 골든타임은 이미 지나갔다. 이제라도 정부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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