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인지도와 제도적 사각지대 속에 방치돼온 '폐고혈압'을 두고, 전문가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중증 희귀질환임에도 제대로 된 질환 분류조차 받지 못한 채, 환자 치료가 제약받는 현실에 학회가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11일 대한폐고혈압학회는 제10회 학술대회 기자간담회에서 폐고혈압 환자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며, 정부에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학회는 폐고혈압을 상급종합병원의 전문진료질병군(DRG-A)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폐고혈압이 고난이도 약물 치료가 중심인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일반 진료군(F8000)으로 분류돼 의료자원 배정과 진료체계에서 소외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대한폐고혈압학회 정욱진 회장은 "폐고혈압은 조기 진단과 전문 치료로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인식 부족과 진료 접근성의 제약으로 환자 고통이 반복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폐동맥고혈압은 대표적인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환자 대부분이 40대 여성이며, 일상생활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치료 실패 시 폐이식을 고려해야 할 만큼 중증임에도 약물 치료는 혈관 이완이나 증상 조절에 머물러 있고, 제도적 지원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에 따라 학회는 ▲질환의 코드 분류 개편 ▲전문센터 기반 진료체계 구축 ▲신약 도입 가속화 ▲정부의 정책적 우선순위 부여 등을 병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대희 총무이사는 "폐고혈압 전문센터의 유무에 따라 환자의 생존율이 최대 30%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며 "전문 질환군 코드 'A'로 분리 지정해 집중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약제 접근성 역시 여전히 주요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까지 국내에 도입된 치료제는 2006년 트라클리어(보센탄)를 시작으로, 볼리브리스(암브리산탄, 2011), 옵서미트(마시텐탄, 2016) 정도에 그쳤다. 병용 요법의 선택지는 제한적이며, 치료 옵션 다양성 확보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GSK의 '에포프로스테놀(Epoprostenol)'은 폐동맥고혈압 치료의 '표준 치료제'로 불리는 약물이지만, 아직까지 국내에는 도입되지 못한 상태다.
이 약은 혈관을 확장시키는 프로스타글란딘 계열 약물로 미국에서는 1995년, 일본에서는 1999년부터 허가돼 사용되고 있다. 다수의 임상시험에서 증상 개선과 생존율 향상을 입증했으며, 세계보건기구(WHO)는 경증 및 중등도 폐동맥고혈압 환자에게 1차 치료제로 권고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확진 환자에게 우선적으로 에포프로스테놀을 투여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관련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 비록 짧은 반감기, 정맥주사 방식, 높은 약가 등 단점이 있지만 치료 효과를 고려할 때 반드시 도입돼야 할 약제로 평가된다.
정 회장은 "에포프로스테놀은 폐고혈압 치료의 근간이 되는 약제로 국내 환자의 치료 선택지를 넓히기 위해 도입을 적극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최근에는 긍정적인 변화도 감지된다. 2014년 국내 허가된 바이엘코리아의 '아뎀파스(리오시구앗)'는 10년 만인 6월부터 급여 적용을 받게 됐다.
또 한국MSD의 '윈레브에어(소타터셉트)'는 '허가-평가-협상 병행 시범사업' 2차 대상 약제로 선정되며 주목받고 있다. 소타터셉트는 실데나필(2005년) 이후 20년 만에 등장한 혁신 신약이다.
장항제 보험이사는 "일부 약제는 이미 급여 진입 단계에 있으며, 국내 치료 옵션의 지형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를 전했다.
하지만 학회는 이러한 변화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정부의 유연한 약제 심사와 함께, 폐고혈압을 중증 희귀질환으로 명확히 인식하고 정책적으로 우선순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욱진 회장은 "폐고혈압은 더 이상 난치성 질환으로 방치돼서는 안 된다"며 "국민 건강을 위한 실질적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며, 학회는 정부·전문가·환자가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지속적으로 제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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