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의료계가 흔들리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은 교육 현장이다.
의대생 유급 사태와 전공의 이탈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일부 대학에서는 세 학년이 동시에 수업을 받는 '트리플링' 사태까지 우려되고 있다. 의료현안이 첨예한 이때, '의사를 제대로 양성할 수 있는 구조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공의 수련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형식적 인증을 넘어 '독립적인 수련평가기관' 구축과 '지도전문의 역할 강화'를 핵심으로 한 구조적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WFME가 제시한 방향…지속가능성·사회적 책무성·질 관리
지난 5월 열린 세계의학교육연합회(World Federation for Medical Education, WFME) 총회에 참석한 국내 전문가들은 국제사회가 강조하는 의학교육의 지속성과 질 관리 체계를 국내 현실에 어떻게 접목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23일 '미래의학교육, 전공의 교육의 방향 모색'을 주제로 열린 의료정책포럼에서도 이 같은 문제의식이 공유됐다.
대한의사협회 문석균 의료정책연구원 부원장은 WFME의 핵심 기능으로 '전 주기 의학교육에 대한 국제 기준 수립과 인증'을 꼽았다. 단순한 정보 교류를 넘어 기초의학교육(BME), 전공의 수련(PGME), 지속직무교육(CPD)을 아우르는 질 관리를 수행하는 평가 기구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BME 영역에서 WFME 기준에 부합하는 체계를 갖췄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KIMEE)은 2015년 세계에서 네 번째로 WFME 인정기관에 지정됐고, 현재까지 정기적 평가를 바탕으로 의과대학 인증을 시행하고 있다.
반면 PGME는 수련환경평가위원회(수평위)를 통해 평가가 이뤄지고 있지만, 독립성과 전문성 측면에서 국제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대한의사협회 김민수 정책이사는 "전공의 수련은 양적 확대보다 질적 내실화가 시급한 시점"이라며 수평위의 형식적 조사 구조에서 벗어나 실질적 교육과 평가 방식 일원화, 이해관계자 균형 거버넌스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김 정책이사는 "현재 수평위에는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동등하게 참여하지 못하면서 행정 편의적 수련환경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수련환경의 기준이 수련기관 운영에 우선해야 함에도 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전공의가 수련기관에서 수련의가 아닌 노동자로 여겨지는 현실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 현실은?…'수평위' 한계, 형식적 인증을 넘어야
국내 전공의 수련 구조가 WFME 기준과 괴리가 크다는 점은 이날 포럼에서 재확인됐다.
대한의학회 박용범 수련교육이사는 수련환경평가위원회의 역할 한계를 짚으며, 현 체계로는 수련의 질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바라봤다. 수평위가 보건복지부 산하 조직으로, 전공의법에 따라 운영되는 이상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추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수평위의 평가는 전공의 교육 내용보다는 법적 기준 충족 여부와 근무 환경 적절성 확인에 머무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수련병원들이 준비하는 것도 대부분 형식적 서류 중심이라는 지적이다.
대한의사협회 김유영 기획이사 역시 "병원들은 서류 위주의 인증만 준비하고 있다. 실질적인 교육 내용은 평가 대상에서 빠져 있다"며 "전공의 피드백은 실명 노출 우려로 반영되지 못하고 평가 이후 개선 조치도 실효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전공의가 어떤 수련을 받는지 판단할 수 있는 정보조차 부재한 현 시스템은 교육의 질이 아닌 형식을 관리하는 데 머물고 있다는 의견이다.
전공의 수련의 질을 실질적으로 높이기 위해서는 '지도전문의 제도 강화'가 핵심이라는 공감대도 형성됐다. 수련의 하루 대부분은 지도전문의와 함께 이뤄지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과 역량이 교육 성과를 좌우한다는 시각이다.
박용범 수련교육이사는 현재 제도의 맹점을 꼬집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정기교육만 이수하면 지도전문의가 될 수 있지만, 실제 교육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는 평가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연간 30조원이 넘는 재정을 전공의 수련에 투입하고, 전공의 수련 인증기구인 ACGME(Accreditation Council for Graduate Medical Education)의 인증을 받지 못한 기관은 정부 지원에서 배제된다. 그리고 미국의 지도전문의는 근무시간의 30~50%를 교육에 사용하도록 제도화돼 있다.
그러나 한국은 교수에게 진료, 연구, 교육이라는 3대 임무를 동시에 요구하면서도 전공의 교육은 평가 지표에서조차 빠져 있다.
박 수련교육이사는 "전공의와 하루를 같이 보내지만 교수는 진료로 이미 방전된 상태에서 교육을 맡는다. 에너지도, 시간도, 보상도 없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 한동우 학술이사도 같은 취지의 제언을 덧붙였다. 그는 지도전문의가 실질적인 교육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을 언급했다.
한 학술이사는 "전공의 수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현장 지도전문의다. 이들이 어떤 태도로 가르치느냐에 따라 전공의의 성장은 달라진다"며 "교육시간 확보, 평가체계 개편, 보상 연계로 지도전문의의 역량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날 포럼에서는 전공의 수련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현행 수평위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전공의 교육 내용을 실질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독립된 수련평가기관이 필요하며, 지도전문의의 평가와 보상을 연계한 구조적 개편 없이는 수련의 질적 개선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지도전문의 제도의 실질화를 위해 ▲지도전문의에 대한 정기 교육과 역량 기준 마련 ▲전공의의 수련 이력에 대한 피드백 체계화 ▲전공의가 지도전문의를 평가하는 다면평가 도입 ▲지도전문의 교육 질에 따라 병원 수련 인증 여부 결정 ▲교육시간 보장과 인센티브 지급 제도화 ▲국가 차원의 수련지원금 확대 등 구체적인 개편 방향 등이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았다.
박용범 수련교육이사는 "수련은 결국 사람에게 달렸다. 한국형 지도전문의 모델을 정착시키고, 이들이 교육 역량을 평가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야 전공의 수련이 살아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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