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최근 대전에서 발생한 초등생 피살 사건은 '정신과 진단서'가 얼마나 위험하게 남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대학병원 의사가 '6개월 이상 치료 필요'라는 소견을 냈지만 불과 20일 만에 '근무 가능' 진단서가 다시 제출돼 가해 교사가 복직했고, 이후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는 이처럼 진단서가 행정 편의적 수단으로 왜곡·남용되는 현실을 지적하며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의사회는 지난 24일 한국과학기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정기학술대회와 정기총회를 열고, 진단서 발행 절차 개선을 위한 전담기구인 '정신과 진단서 TF'를 지난 3월 공식 발족했다고 밝혔다.
의사회는 진단서가 복직과 휴직, 직무수행능력, 운전면허 취득 및 갱신, 총포·맹견 관리, 보상 및 배상, 법적 다툼 등 사회·법적 영역에서 폭넓게 활용되고 있으나, 행정 편의적 수단으로 부적절하게 사용되는 사례가 빈번하다며 사회적 인식 개선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진단서 TF는 향후 이러한 상황에 적절한 의사결정 절차를 제안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방침이다.
의사회는 지난 2월 대전 초등생 피살 사건이 진단서(혹은 소견서) 관련 사회적 문제를 보여준 대표적 예라고 들었다.
의사회는 "통상 6개월의 정신과 치료 기간은 재활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임에도 휴직 시 대체 교사 모집 등 행정 편의적 이유로 단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며 "정신건강의학과 소견은 환자 상태에 따라 변화 가능성이 큰데 이를 단편적으로 현장에 적용하면 전문의에게 과도한 책임이 전가된다"고 지적했다.
기존 타과 진단서와의 차이도 문제로 꼽혔다. 대한의사협회는 2015년 '진단서 등 작성·교부 지침'을 발간하며 각 과별 전문가 합의를 통해 상해진단 치료 기간을 부록에 수록했으나, 치료 완료와 재활 개념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정신건강의학과 질환은 해당 부록에 치료 기간조차 포함되지 않았다.
작업환경의학과의 '사업장 근로자의 업무적합성 평가 기본지침'에도 업무적합성 평가 내용은 있으나 정신과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부족하다는 의견이다.
우리나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 겪는 고충도 설문조사로 드러났다.
의사회가 285명의 전문의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환자나 보호자가 진단서 내용에 불만을 표시하며 수정을 요구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81.5%에 달했다. 발급한 진단서로 인해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한 전문의는 74.1%였고, 환자나 보호자가 진단서를 악용할 수 있다는 걱정을 한다는 응답은 66.7%였다. 진단서 발급 과정 자체가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해 업무에 지장을 받았다는 전문의도 78%에 이르렀다.
많은 전문의는 환자·보호자가 요청하는 진단서가 치료 목적이 아닌 경우가 많으며, 애매한 인과관계 기재나 과장된 내용을 요구받는 사례가 흔하다고 호소했다. 명확한 치료·재활 기간 기준조차 없는 상황에서 발병 원인이나 법적·사회적 의미까지 기재를 요구받는 것은 부당하며, 이러한 판단은 행정기관이 별도의 위원회를 조직해 다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해외에서는 이미 보완적 제도를 운영 중이다. 일본은 후생노동성이 직장 복귀 및 업무수행 능력 판단 기준과 절차를 명확히 하고 이를 가이드북으로 발간했으며, 미국은 개별적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다면적 평가를 통해 결론을 내리는 방식을 취한다.
이에 따라 진단서 TF는 대한의사협회 및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협의해 '정신건강의학과 진단서 등 작성·교부 지침'을 발간할 예정이다.
의사회는 "현행 진단서의 활용 범위와 문제점을 분석하고 개선방안을 모색해 행정기관 및 관련 단체와 협의하며, 법률적 정비가 필요한 부분은 국회와 협력해 공청회 등을 통해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나아가 의사회는 "진단서가 단순한 질환 유무나 치료 필요성 확인을 넘어 업무수행 능력, 직장 복귀 가능성, 보상 및 배상 등 사회적 책임 여부까지 요구되는 경우에는 합의체나 심의기구를 통한 다면적 평가 절차를 제도화하겠다"고 강조했다.
독자의견
작성자 비밀번호
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