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리스크'에 무너지는 산부인과…"'분만' 의사 사라진다"

사법리스크에 분만 기피 확산…의사들 "현장 버티기 한계"
정부 대책, 실효성 논란…의료계 "해법은 여전히 부족"
국가 책임과 제도 전환 촉구…분만 인프라 회생 절실

박으뜸 기자 (acepark@medipana.com)2025-09-22 05:57

(왼쪽부터)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김재연 회장, 이기철 부회장. 사진=박으뜸 기자

[메디파나뉴스 = 박으뜸 기자] 사법 리스크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산부인과가 무너지고 있다. 현장에서는 "이대로라면 분만을 하려는 의사가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른다.

최근 분만 과정에서 발생한 의료사고에 대해 법원이 형사 기소와 고액 배상 판결을 내리면서 의료진의 불안은 극대화됐다. 분당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와 전공의가 분만 중 과실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뇌성마비 신생아 분만 사건에서 12억원, 유도분만 중 뇌 손상 사건에서 16억원, 신생아 사망 사건에서 4억원의 배상 판결이 이어졌다. 연이은 판결은 의사들을 분만 기피로 몰아넣었고, 일부는 분만실을 폐쇄하거나 진료 자체를 접는 상황에 이르렀다.

인적·물적 인프라도 동시에 붕괴되고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 평균 연령은 54세를 넘어섰고, 전체의 3분의 1이 60대 이상이다. 30대 이하 전문의는 11.6%에 불과하며, 2024년 전공의 모집에서는 정원 188명 중 단 1명만 지원해 지원율 0.5%라는 사상 최악의 기록을 남겼다.

분만 의료기관은 2013년 706곳에서 2024년 425곳으로 줄어 약 40% 감소했고, 전국 250개 시·군·구 중 70여 곳은 아예 분만이 불가능하다. 지난해 충북 청주에서는 임신부가 75개 병원에서 이송을 거부당한 끝에 6시간 만에 치료를 받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붕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국민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정부와 직접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21일 기자간담회에서 김재연 회장은 "최근 정부 측과 만나 사법 리스크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며 "불가항력 의료사고에 대한 보상을 정부가 어느 정도 지원해주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정부가 불가항력 분만 사고 국가 보상 한도를 3천만원에서 3억원으로 상향한 바 있다. 그런데 김 회장에 따르면 최근 배상 판결이 10억 이상이기 때문에 산부인과 기피 현상이 극심해지고 있다. 이 부분을 인식한 정부가 배상 금액 지원에 대해 의료계와 논의에 나선 것이다.

다만 정부 지원은 조건부였다. 김 회장은 "만약 의사가 3억원을 보상받는다면 나머지 3억~7억원을 정부가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그 조건이 기존 배상 보험에 가입하고, 새로운 형태의 보험에 다시 가입한 경우에만 지원하겠다는 제안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김 회장은 "분만 실적이 있는 병원으로 대상을 한정하고,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주관사로 두는 방안, 보험사 선정은 민간 보험사와 대한의사협회 공제조합을 모두 검토하는 안 등이 논의됐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결국 정부가 10억원 보상을 언급한 것은 사실상 언론플레이라는 비판이다.

김 회장은 "불가항력 배상은 대부분 재판까지 가지 않고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서 종결되므로 조정원이 10억원 배상을 결정할 일은 거의 없다. 최근 수십억 원대 배상 판결은 모두 법원이 의사 과실을 인정한 사건으로, 불가항력 사고와는 별개"라고 말했다.

산부인과의사회는 불가항력적 의료사고 보상은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대원칙이 확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과실·무과실 여부에 따라 지원에 차등을 두는 방식보다는, 필수의료 영역만큼은 모든 의료사고 배상을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방향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이기철 부회장은 현장의 불합리를 짚었다. 그는 "정상 분만 수가는 100만원인데 배상은 10억~20억원을 요구한다"며 "현실적인 수가 보장이 뒤따른다면 고액 배상도 감당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정부가 통제한 낮은 수가 구조에서 의료진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개원 3년 이내에 사고가 발생하면 병원을 닫거나 신용불량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며 "국가가 최소한의 보장 장치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분만에 나서는 사람은 더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의료사고 처리 특례법' 제정안도 첨예한 쟁점이다. 법안은 의사가 책임보험이나 공제에 가입할 경우, 업무상과실치사상죄에 대해 조건부로 기소를 면제하는 것이 핵심이다. 의료계는 이를 필수의료 붕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평가하지만, 환자단체는 '의료인 특권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김재연 회장은 "이 법의 성패는 '중대한 과실'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할 것인가, 그리고 '종합보험' 요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며 "불분명한 기준은 법적 분쟁을 '과실 여부'에서 '과실의 중대성'으로 옮길 뿐 갈등을 해소하지 못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중대한 과실의 정의를 다자간 협의체를 통해 명확히 하고,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기능 강화, 단계적 도입과 실증적 평가를 병행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산부인과계는 단순한 보완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제도 전환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의사회는 필수의료 회생 기금을 통해 의료사고 보상과 인력 양성, 고위험 수술 수가 인상에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중증·응급·분만 분야에는 공공정책수가를 도입해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고, 국가 차원에서 의료배상책임보험 가입을 지원하거나 의무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여기에 불가항력 의료사고에 대한 국가 완전 책임제 전환, 분만실 유지 기본 수가 신설, 고위험 분만 전담 의료기관 및 분만 취약지 지원 강화도 포함됐다.

김재연 회장은 "정부의 대책은 언론에 비치는 것과 달리 현장에서는 실효성이 거의 없다"며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분만 인프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보완책이 아니라 국가적 책임과 제도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 여러 나라처럼 필수의료 영역만큼은 국가가 전액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0년 뒤에는 분만실 자체가 사라지는 현실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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