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K칼럼] 우리가 쓰는 약은 어디에서 왔을까 - 테스토스테론

백승만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메디파나 기자2025-08-11 05:50

소중할수록 깊이 감싼다. 몸도 마찬가지다. 두개골에 쌓여 있는 뇌나 갈비뼈 밑에 깊숙이 위치한 심장이 대표적이다. 뇌나 심장 말고도 대부분의 장기는 몸속 근육이나 지방으로 보호받고 있다. 

그런데 고환은 조금 다르다. 달랑 얇은 피부만으로 둘러싼 채 사실상 몸 밖에 위치해 있다. 주요 장기 중에서 유일하게 육안으로 관찰 가능하다. 해부학적 특징이다. 생리학적 이유이기도 하다. 적절하게 성호르몬을 생성하고 정자를 만들어 생식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온도가 낮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해부학이든 생리학이든 간에 예전부터 고환은 제거의 대상이었다. 환관은 어릴 적 거세를 해서 생식기능이 없어야 왕의 곁을 지킬 수 있었고, 카스트라토도 거세를 통해 소프라노의 음역대를 감당할 수 있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거세는 꽤 오래전부터 이어진 관습이었다. 돌출되어 있는 장기의 안타까운 숙명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이렇게 잘라낸 고환을 다른 개체에게 이식하기 시작했다. 수탉의 고환을 잘라서 다른 수탉의 복강에 넣는 것과 같은 조잡한 형태의 시술이 18세기 이후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이식한 고환 덕에 수탉의 벼슬이 더 자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하긴, 닭벼슬 따위 누가 관심 갖겠는가.

변화의 계기는 1889년 브라운-셰카드의 실험이었다. 브라운-셰카드는 개와 기니피그의 정액, 혈액을 뽑아 섞었다. 좀 엽기스럽지만 그러려니 하자. 

당황스러운 건 그 뒤의 일이다. 그는 개와 기니피그의 고환을 거세한 후 갈았다. 그리고 최소한의 생리식염수로 추출해서 앞서 뽑아 두었던 정액, 혈액과 섞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다른 개체에게 투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엽기스러운 혼합액을 자신에게 주입했다. 

그는 이 실험을 아홉 차례 반복한 후 학회장에 섰다. 그리고는 선언했다. 자신은 회춘했다고. 그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집중력이나 근력이 향상됐다는 말을 던지며 이 72세의 노인은 학회장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대조군과 실험군도 설정되어 있지 않고, 실험 프로토콜도 자세히 제시하지 않은 이 실험은 당시의 기준으로 봐도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학자들의 평가였다. 학회장 밖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회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던가. 진시황처럼 불로초를 찾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는가하면, 피터팬을 꿈꾸며 이야기에 만족해하는 일반인들도 있다. 그런데 젊음의 비결이 집 앞에 돌아다니는 개들에게 있었다니. 심지어 그 결과도 노학자가 자신의 몸을 시험해가며 얻어낸 숭고한 결과라니 사람들이 열광한 것이다.

브라운-셰카드의 엽기액은 이제 '세쿠아린(Sequarine)'이라는 상품명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유럽 뿐 아니라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꽤 화제가 될 정도로 주목을 끈 제품이다. 그런데 세쿠아린은 정말 효과가 있었을까?

생리학적으로 접근해 보자. 고환에서 남성호르몬이 만들어지긴 하지만 곧바로 혈액을 통해 배송된다. 따라서 공장은 금방 빈다. 

브라운-셰카드가 어떤 실험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위약효과로 인한 심리적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한두 번의 제한적인 실험 결과로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례가 쌓이면 이런 위약효과는 실체가 드러나는 법이다. 시간이 가며 세쿠아린의 효과는 부질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

그렇다고 포기할 사람들인가. 회춘이 눈앞에 있는데 고환 추출물에서 효과를 보지 못하자 학자들은 고환 추출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회춘의 물질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워낙 미량 존재하는 물질이었기에 처음에는 확보하기 어려운 물질이었다. 

그래도 뜻이 있으면 길은 통하는 법. 스위스의 에른스트 라케르는 고환을 대량으로 모아서 성호르몬의 대명사 테스토스테론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분리한 테스토스테론의 양은 10밀리그램 정도. 당시 그가 처음에 모았던 고환은 100킬로그램이었다. 황소의 고환을 이용한 눈물겨운 실험이었다.

1935년 라케르의 결과가 공개되며 테스토스테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남성호르몬은 그 자체로 흡수가 어려웠고 간독성도 심했기에 안타깝게도 그 자체로 이용되지는 못했다. 

그보다는 전구약물이나 유도체 등의 형태로 연구가 이어졌다. 지금 테스토스테론 유도체는 남성호르몬 보충요법에 활용되고 있다. 브라운-셰카드의 실험이 늦게나마 빛을 보고 있다. 그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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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백승만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박사
- 전)美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 박사후연구원
- 현)경상국립대학교 약학대학장  
- '분자 조각가들', '대마약시대',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스테로이드 인류' 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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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시간 : 2025-08-11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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